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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어록 - 인간과 권력의 본질을 꿰뚫는 문장들 ㅣ 사기 (민음사)
김원중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평점 :

고대 중국의 5가지 형벌 중 궁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궁형은 죄인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자는 고환을 제거함으로서 남자로서의 구실과 기능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듯 죽기보다 고통스러운 치욕의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사기' 라는 중국 불멸의 역사서를 써내려간 사람이 바로 오늘 리뷰하게 되는 책의 원저자 '사마천' 이다. 그리고 이 책은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에서 약 200여개의 주옥같은 명문들을 중국 역사와 고전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김원중 교수가 직접 발췌하여 엮은 보석과 같은 저작이다.
사기 자체가 52만자가 넘는 어마무시한 분량의 방대한 저작이기에 어쩌면 우리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에게 있어 사기는 결코 범접하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중국사와 고전 문헌에 능통한 저자가 자신의 학자적 역량을 동원하여 심혈을 기울여 추려낸 본서의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여겨진다.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다룬 시대는 중국 고대 왕조인 하, 은, 주나라부터 춘추 전국시대에 이른다. 약 2천여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역사 속 무대 위에 등장했다 사라졌던 수 많은 인물들이 내뿜는 그 진득하면서도 끈적한 희노애락, 애욕의 이야기는 오늘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폐부를 향해 그 촌철살인의 교훈적 비수를 겨눈다.
페이지마다 독자로 하여금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만드는 본서 '사기어록'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나를 다스리다" 부터 "타인을 이해하다, 세상과 더불어 살다, 통치의 기술" 까지 인간사에 있어서 결코 거칠 수 밖에 없는 처세와 인생의 도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 안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호령했던 왕후장상의 다채로운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명구들과 교훈들이 알알이 꿰어진 진주와 같이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이 가지는 깊이있는 아름다움을 맛보도록 돕는다.
200여개의 명문 중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진중한 무게감을 갖는 가르침들 중 책을 읽는 나의 마음을 울리는 유독 결이 다른 몇몇의 문장들을 노트에 필사했다. "너무 고결하면 받아주는 사람이 드문 법, 고독한 자의 비애다. 처세는 그래서 어렵다." 이는 초나라 때의 정치가 굴원을 빗대어 말한 문장의 한 대목이다. 굴원은 탁월한 정치가였지만 너무나 고결하고 청렴결백하여 정적들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인해 나중에는 중상모략을 당해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비참한 삶을 맞이했다. 적당히 흙도 묻고, 때도 묻히는 삶이야말로 당시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처세의 한 방법이었다고 하니 굴원은 이에 편승하지 못한 책임을 본인의 삶으로 갚은 것이다. 정말 고독한 자의 비애며 현실 정치가 가져다주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굴원에게 요구되어졌던 그 추잡한 처세의 태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어진다는 짜증나는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마음 한켠이 아리다.
"손님이 오면 귀천을 가리지 말고 문밖에 세워 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서서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인간이 그 순간 얼마나 복잡한 생각에 빠져드는지를 말이다." 이는 전한 시대 '정당시' 라는 사람이 태사(太史)벼슬에 있을 때 문하생들에게 인재를 구하는 원칙을 설파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갑의 자리에만 있을 수 없다. 갑의 자리에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을, 그 이하의 자리까지 곤두박질 쳐 내려가는 일이 다반사인 세상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그 마음의 복잡함과 씁쓸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처럼 다가온다. 간혹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때, 받아들여질 지 의문인 상태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부탁을 해야하는 경우와 같이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명문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정당시는 본인을 찾아 온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자상하고 세밀하게 헤아릴 줄 아는 위인이 드문 요즘이기에 본 명문은 나의 마음에 더 깊이 와닿았다. 상대적 약자들에게 하루에도 한 트럭이 넘는 엄청난 욕설과 비난, 비방을 마치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는 상급자들과 절대 갑의 위치에 있는 고용주들의 눈총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범인들에게 정당시의 말은 가슴 따뜻한 위로로 다가온다.
"사람은 명예로운 상태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처세의 원칙은 만고불변의 원칙이다." 이는 채택이라는 자가 범저라는 사람에게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이제 그만 물러나라고 말한 문장의 해제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 는 세간을 떠도는 잡문이 존재하지만 이는 비단 지금의 세대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어 인류 역사 가운데 항존했던 명문의 현대판 버전일 뿐이다. 부귀와 명예, 권력을 손에 쥔 인간들은 결코 자신의 권좌를 손쉽게 내어놓고 물러나지 않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다. 끝까지 붙잡고 싶고, 붙들고 싶은 그 영원할 것만 같은 부귀영화의 모란꽃을 쉽사리 놓을 수 없었던 수 많은 인간군상들의 말로는 흉하고 추했다. 끊임없는 부와 명예, 권력을 갈망하며 자신의 삶을 미친듯이 드라이브해 가는 작금의 현대인들에게 본 명문은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인생에 있어서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올 줄 아는 때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도 이 내려오는 때를 놓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신문지상에 그들의 이름을 욕스럽게 수놓는다. 부와 명예, 권력에의 그 탐욕스러움을 끊지 못할 때 인간의 격은 짐승만도 못하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범저, 채택열전] 을 통해 인간사를 관통하는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진리를 주저함 없이 던짐으로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인류 역사가 강처럼 끊임없이 흘러온 이래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시대가 만들어가는 역사만큼은 새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그것은 한낱 그들의 얕은 바램이었음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졌다. 역사는 이전 것의 재탕일 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함은 없다. 그렇기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이들이 남긴 역사의 목소리에 겸허한 자세로 조용히 귀기울이는 겸손의 태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마천이 남긴 위대한 저작 '사기', 그리고 그 보물같은 심연 속에서 길어올린 본서 <사기어록>이 이 첨단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크다. 본서의 저자 김원중 교수는 책의 서문에서 사기를 가리켜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자신의 혼을 담아 써 낸 명언 명구로 장식된 정교한 갑옷같은 책이다" 라고 평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모욕스러운 궁형의 아픔 속에서 사마천은 매일 식은 땀을 흘리며 사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아마도 제대로 된 몸이 아니었기에 집필을 하는 내내 사마천은 그의 신체가 내뿜는 처절한 고통 속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극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는 마침내 동양 사상과 사유체계의 근간이라 불리는 '사기' 집필의 엄청난 위업을 이룬다.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있어 모든 인류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이 촘촘한 얼개를 이룬 그물과 같은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그의 명언이 가득한 본서 <사기어록>을 집어들고 읽어야 할 충분한 당위성은 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의 시대가 결코 다름이 없다는 명약관화한 사실에 기인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이 혼탁한 세대 속에서 본서를 펼쳐든 독자는 2100여년의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훔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인고의 붓끝을 놀렸을 사마천의 아련한 체취를 맡게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