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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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간의 추석 연휴가 끝났다. 명절 때마다 가족 친지들이 모여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윷놀이도 하고 왁자지껄 담소도 나누는 등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지만 어느 정도 대화의 화제거리가 바닥나게 되면 보통 한자리에 둘러 앉아 TV시청을 하곤 한다. 요즘들어서는 보기가 어려워진 예전의 명절 단골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M방송사의 'TV 마당놀이' 였다. 우리나라 마당놀이의 전설적 배우들인 윤문식, 김성녀, 김종엽 씨등이 단골로 출연하여 관객들과 소통하며 펼치는 해학과 익살, 풍자가 곁들여진 신명나는 한마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놀부전, 심청전, 별주부전, 이춘풍전 등 우리네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마당놀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 정치의 그늘을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로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으며 서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스럽게 긁어주었던 풍자극의 전형이 되었던 명절 단골 프로그램이었던 TV 마당놀이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권의 책을 손에 쥐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17~8세기 영국의 정치와 종교, 사회상을 비꼰 풍자문학의 고전,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이다. 걸리버 여행기하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아동판 문고로 접했던 소인국과 거인국의 걸리버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동판 걸리버 여행기는 난파된 배에서 탈출한 주인공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만나게되는 재미있는 해프닝들을 아이들의 정서와 눈높이에 맞춘 그야말로 아동 도서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게 된 걸리버 여행기는 그동안 독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걸리버 여행기의 후반부 이야기까지 완벽하게 수록된 완역판으로서 어른들을 위한 버전이라 볼 수 있다.

본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1부와 2부에서는 소인국과 거인국에 도착한 걸리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3부와 4부의 내용은 매우 생소한 걸리버 여행기의 나머지 스토리를 접할 수 있는데 3부를 통해서는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 방문, 4부에서는 말(馬)의 나라인 후이늠국에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별히 3부의 라퓨타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묘하게 오버랩되는 하나의 애니메이션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미래소년 코난>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있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인 <천공의 성 라퓨타>이다. 제목부터가 거의 99% 일치하는 이 애니메이션의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 3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전이 현대에까지 미치는 그 문학적 영향력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정치, 종교, 사회적 시대상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감없는 신랄한 비판과 해학과 익살이 코드화 된 이야기의 주제들은 독자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끔 만드는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만나게 되는 인사이트 중의 몇가지를 소개해본다.

소인국의 정치 행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의 후보 기준의 가장 중요한 점은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한다는 점이다. 신(神)은 공직 수행에 있어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공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으셨고, 평범한 지적 능력만 있어도 누구나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기에 능력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도덕성의 고결함을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도덕성이 결여된 자는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도덕성의 결핍을 보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능력은 학습과 훈련으로 개발되어질 수 있지만 도덕성은 학습과 훈련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능력이 좀 떨어지는 자가 무지에 의해 실수해도 그것은 공공의 이익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도덕성이 결여된 자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실수를 저지르면 그것만큼 공동체에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즉 다시말해서 좀 멍청해도 도덕성이 깨끗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의 실수는 공동체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머리는 똑똑하나 도덕성이 결여된 괴물같은 인간이 그 비범한 머리로 저지르는 잘못은 공동체의 운명까지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시대와 인간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마치 요즘 대한민국을 크게 뒤흔들어 놓은 고위급 공무원 인사를 앞두고 벌어진 혼란스러운 정국의 한 단면을 따끔하게 꼬집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함을 느낀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거인국에 표류한 걸리버가 거인국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벌레같은 모습에 대해 서술한 내용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단상이다. 소인국 릴리펏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어마무시한 거인이었다. 그러나 거인국 브롭딩낵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릴리펏과 같은 소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며 걸리버는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그 자체로 크거나 작은 것은 없으며 비교에 의해서 그런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비교의 대상을 바라봄으로서 자신의 크고 작음을 가늠할 수 밖에 없기에 절대적인 크고 작음의 차이는 없다. 그렇기에 인간사의 그 수 많은 불행과 비참한 현실의 원인은 바로 다른 것과의 비교, 남과의 비교로 인한 절망감과 상실감에 기인한 빈약한 인간의 관점이다. 절대 가난의 환경 속에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전 세계 행복지수 1위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완전 복지의 기치를 내건 북유럽 다수의 국가들이 가진 높은 자살율의 상관 관계는 아마도 일정 부분 비교라는 관점의 부작용은 아닐런지...더불어 먼 나라를 살펴볼 필요도 없이 한국의 상황 속에서 남과의 비교로 인한 사회적 질병의 확산은 걸리버 여행기 거인국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귀한 깨달음이다.

또한 거인국에서 소인이 된 걸리버가 자신을 낚아 챈 원숭이에 대해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는 이야기를 했을 때 거인국 사람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은 그저 한낱 벌레같은 미물이 내세우는 만용에 코웃음을 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걸리버는 덩치가 너무 커서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덩치가 작은 사람이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고 용기를 자랑하려는 것은 비웃음을 살만한 헛된 일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네 삶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무엇인가 나의 능력과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서 우쭐대며 없는 말도 만들어내는 열정을 보이지만 나와는 근본부터 비교할 수 없는 비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나의 모습은 한낱 무식자가 "나의 지식과 재능 좀 알아봐주세요!" 하고 쇼를 하는 정도의 낯뜨겁고 초라한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모르는 허장성세 인간 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4부에서는 말 종족인 후이늠국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탁월한 지성과 이성을 지닌 후이늠(말)과 야만스러운 괴물과 같은 존재들인 야후(인간)족을 바라보며 느낀 걸리버의 단상이 전해진다. 비국교도에 대해 관대했던 영국의 진보적 정당인 휘그당과 영국 국교회를 지지했던 보수파 정당인 토리당의 대립, 카톨릭과 개신교, 국교도인 성공회와 비국교도인 개혁파 청교도간의 종교적 갈등 등 당시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차별 등이 적절히 믹스되어 영국의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갈등과 대립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된다. 마치 인간의 이성과 지성, 종교적 관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은 암울한 인간 사회는 저자 스위프트가 볼 때 미개하고 원시적인 사회 그 자체였다. 저자는 이러한 인간들을 미개한 야후족으로 묘사한 반면 고결하고 흠없는 지적 대상물로서 말(馬)을 선택하고, 지성적 이성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투영시킨다. 마치 조지 오웰의 풍자 소설 <동물농장>에서 뛰어난 지성적 존재인 돼지와 탐욕스러운 인간과의 대립을 보는 것만 같다.

교화되지 않는 미개한 짐승, 인간 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풍자를 통해 부패한 인간 사회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들춰낸 이 근대 풍자문학의 대가가 가지는 시대적 혜안은 가히 신비스럽기만 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사회의 타락과 부정, 오염된 인간 정신에 관한 시대적 아픔은 이후 수 많은 작가들에게 훌륭한 글 쓰기 소재거리가 되어졌지만 스위프트만큼 놀랄만한 통찰을 선보인 작가도 드물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아동판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를 집어들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최고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삶의 정황 속에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또 하나의 소인국, 거인국, 천공의 섬 라퓨타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들일 수 밖에 없다. 눈을 들어 내 주변을 돌아보고 관점과 사고를 확장시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아마 드물 것이다. 본서는 근대를 살다 갔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탁월한 지성의 촌철살인과 같은 풍자의 한 토막을 통해 인간 세상을 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익함과 함께 서평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해학과 익살로 가득한 TV 마당놀이 한편을 보는 것과 같은 깊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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