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8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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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1. 이 시집의 키워드나 중심이미지를 고른다면 ‘그림자, 절벽, 피가 흥건한 사고현장’를 꼽겠다. ‘그림자, 절벽, 피가 흥건한 사고현장’이 반드시 어두운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사물은 정도의 차이에도 반드시 양가적인 감정이나 색채를 보유한다.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검은 색이 되듯이 그림자 속에 들어온 주체들의 감정은 각양각색이다. 벼랑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사람이 남겨 놓은 그림자, 사고 현장에서 수습되는 시신의 그림자는 주체(나,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이자 그 주체가 겪는 고독이다.


경쾌한 리듬으로 쓴 시들도 보이지만 고독이 불가능이라는 색연필로 어둠 속에서 긋는 윤곽을 따라가면 흐릿하지만 이미지가 잡힐 것이다.



* 메모



- 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 16-17쪽 부분



우리는 없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없는 의자와 같이 마주 앉아 있다/ 의자는 없고/ 서로 의자가 되었으므로/ 당신과 나 사이에는 테이블이 놓여야 하지요/ 테이블 아래로 밤이 자꾸 와서/ 당신과 나 사이가 깊어지지요/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그곳에 묻히지요/ 모서리가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로 늘어나지요/ 어긋나는 중이어서 반짝거려요/ 당신의 어깨에서 단풍잎/ 당신의 오른팔에서 불가사리가 떠올라/ 테이블이 자꾸 출렁거려요/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서 솟아오르는 새/ 뚫린 당신의 가슴과 등 사이에서/ 의자가 사라지고/ 살은 짓무르고/ 오독거리는 것들을 지나/ 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 그 순간 당신과 나는/ 무릎뼈와 조약돌은 같은 안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될까요/ 모든 방향이 사라지고 그러나 바람은/ 방향이 사라지는 곳에서 불어온다면/ 울면서 지워지면서/ 우리는 우리가 먼 미래에서/ 이제 막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그림자들 49쪽 부분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후략)



- 일요일의 고독 1 50쪽 부분

햇빛이 어린 나무 그림자를 아스팔트 바닥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아이가 제 그림자 속에 공을 튕기며 걸어갔다// 비둘기 두 마리가 나란히 땅에서 하늘로 수평을 끌어올리며 솟구쳤다// (중략)// 시간은 수십만 개의 허공을 허공은 수십만 개의 항문을 동시에 오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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