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재촉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04
유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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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문학과지성사




1.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는 남자. 이름, 직업, 사는 곳을 모르는 얼굴만 아는 여자가 다가온다. 출퇴근길의 신호등 앞, 전철 앞, 커피집 앞에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갔던 얼굴이 온다.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귀엽다’는 말만 하는 여인을 지켜보기만 하는 남자. 해가 진다. 노을이 진다. 빛과 어둠이 갈마들고 낮과 밤이 흘레붙는 시간. 남자는 ‘만질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만질수록 커지는 것이 사랑이다.’는 말을 생각한다. 그녀와 나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강아지는 그 그녀를 따라간다. 남자는 목줄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긴다. 팽팽한 침묵만 남는다.




2. 시인이자 미술평론을 하시는 유종인 시인의 시집. 운율, 시어, 소재에서 비롯되겠지만 동양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현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이 곳곳에 있어서 고풍스럽다. 서양화의 두터운 마티에르와 상반되는 사랑과 사물을 말이라는 붓으로 그려내는 여백과 질감이 좋다.




3. 메모



- 풀 7쪽

무덤까지 와도 막히는 풀이 없다/ 묏등이 한 번 솟은 후에/ 다시금/ 초록을 들어 올려주니까// 풀은 언제까지나 무덤을 쓰다듬는 노래니까/ 지구 땅 별에서 손을 뗀 적 없는/ 늘 푸른 집착이니까// 주검보다 드센 곳에/ 하얀 풀뿌리가/ 높으니까




- 간장 종지, 24-25쪽 부분

진땀이 모이는/ 잔손금이 오글거리는 이 손바닥 종지를 오무려보니/ 어딘가 모르게 짠맛이 다녀간다



- 꼽추 여자 대추 따는 남편 28-29쪽

자신이 꼽추인 것도 꼽추인 거지만 새삼/ 남편이/ 꼽추 여자 남편이라는 걸 세상에/ 들킬까 봐, 호랑이 눈을 뜨고/ (···)// 꼽추여자/ 혹, 들키기라도 하면/ 등짝에 솟은 호박 등(燈) 하나/ 얼른 꺼내주고 훤칠한 남편 얼른 등 뒤로 돌려 감출 것 같은/







- 살구 두 개가 있는 밤 60-61쪽 부분

늦된 시간이 어물쩍/ 그걸 늦된 살구에 맡겨놓았다는 듯이//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니/ 달은, 누가 저들만의 밤 회식 자리에 불러 간 모양이다/ 누가 은쟁반도 받치지 않고 가져갔나// 나는 살구의 유감(有感)을 먹는다/(···)// 살구 두 개가/ 비리고 시고 달콤한 속속들이 유감을/ 내게 옮기는 사이, 달은/ 어느 밤의 회식에서 돌아와 슬쩍 구름 미닫이를 당긴다/ 유감이 만면(滿面)하다/ 이미 달을 맛본 당신이,/ 내 사랑의 완곡(緩曲)을 훤히/ 한끝 유감이, 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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