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시인선 24
서대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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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서대경




1.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시집을 덮은 후 폐탄광촌의 이미지가 남는다. 모두가 떠나버린 마을의 담장과 하늘은 잿빛이고 거미줄처럼 공중을 옥죄는 전선들은 바람에 나부낀다. 수많은 구멍과 담장 사이로 쥐들이 돌아다니고 마을 근처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이 놓여 있다.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떠났던 사람이 꿈속에서 그곳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아버지, 어머니, 백치, 무당의 딸 등 실물과 헛것의 경계에 서있는 존재들이 가득하다.


시인 맨 앞의 ‘시인의 말(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처럼 주체는 자신이 없는 곳(대체로 꿈 속)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외로움에 몸부림 치는 움직임이라기 보다는 자기결정권을 가진 ‘완전한 고독’으로 빠져드는 주체다.



형식적으로도 대부분의 시가 산문형태이며 한 편마다 짧은 단편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침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폐탄광촌을 견학한 듯.




2. 메모



- 차단기 기둥 옆에서 70쪽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소박한 삶 11쪽 부분

아름다운 그녀는 자전거를 탄다 (···) 가끔 소방차도 달린다 선명하게 붉은 사이렌이 그녀의 자전거를 스친다 (···) 텅 빈 도로 끝에서 서정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서정적인 사건들이 신문에 났다 햇빛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은 투명하고 작고 고요했다 솜털이 나 있고 매끄러웠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다 (···) 목욕탕 굴뚝에서 사는 사내가 그녀에게 인사한다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올려다본다 사내에게 말한다 화재가 발생했어요! 페달을 밟는 발이 빛난다 하얀 치마 속 종아리가 투명하게 빛난다 사내는 멀어져 가는 자전거에 대고 소리친다 투명하고 작고 고요한 불이에요! 사내는 소리친다,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소리친다 얼음처럼 차가운 불이래요!




-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32-36쪽 부분


2.
상가 건물 오 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 전깃줄 사이로 열리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쭉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66-67쪽 부분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바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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