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 시인선 472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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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 지성사
#임승유


수족관 속에 손을 넣고 오직 촉감에 의지하여 잡히는 생물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이 생각났다. 시각은 빛의 여과망을 통과한 제한된 감각이지만 촉각은 보지 않고도 말할 수 없어도 즉각 느껴지는 감각이다. ‘모자의 효과’를 읽으며 ‘친척 집에 간다는’ 것이 왜 모자를 쓰는 일이었을까, 왜 아이가 아이와 아이를 낳았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알 것 같지만 말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 같다. 이 흥미로운 시가 시집의 중심이다.



금을 넘되 금을 밟지 않고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 때로는 허들 위로 떄로는 림보 아래로 장애물을 통과하는 시, 시인은 장대를 사용하는 고공 점프를 하진 않지만 단단히 심어놓은 발목에서 쑥 자라나는 대나무처럼 높이 솟아 봉을 건드리지 않고 배면뛰기로 바를 넘는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음 시기를 준비하는 높이뛰기 선수같은 시.




- 모자의 효과 9-11쪽 부분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 긁적이며 생쥐가 태어나는 것 같다// (···)//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와/ 아이와/ 아이를// (···)//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친척이 물 한 컵을 줄 때는 숨을 참으면 된다 맛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난다// 웃는 이가 된다/ 젖은 웃는 이가 된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투명한 인사 22-23쪽 부분

1 아저씨가 먼 곳에서 가져 온 건 정말 멀고 먼 이야기였다 멀고 멀어서 오다가 부서지는 이야기였다// 다 듣고 일어날 때 너무 먼 곳에서 오고 있는 이야기라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 같아서// 아저씨가 사라지기 전에 뒤를 돌아다봐야 했다// 2 물 항아리를 들여다 본 이후 목덜미를 만지는 버릇이 생겼다// 소리가 넘치면 몸을 끌고 가게 된다 소리는 한 몸이 다른 몸에게 가 부딪치는 것이라서 몸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서야 입을 벌린다// (···)



- 책상 58-59쪽

엎드렸다 일어나면 온도가 심어진다 체온을 나누다 헤어진 너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얘들아,// 부르면 한꺼번에 달려오겠지만/ 여기서만 얘들인 얘들아/ 앉아만 있던 테두리가 피부가 된 얘들아// (···)// 엎드렸다 일어나면 꽃집 앞에서 서성이는 기분이 들고/ 알맞은 온도란 이런 것일까// 흘러내린 얼굴을 주워 담듯 계속해서 아이들이 태어난다// 빈칸을 다 채웠는데도/ 아직 다 오지 못한 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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