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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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사


1. 읽어도 잘 이해 안 되는 시집. 이해 안 되도 자꾸만 책장을 넘기고 싶은 시집. 가끔 이해가는 시들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세포를 강하게 끌어 당겨 세포들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시집. 부산한 출근길 보다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시집. 너무 빠지면 잠이 안 올 수도 있으니 주의. 읽기 전부터 겁먹고 읽지 말라는 건 아님. 한 번 다 읽고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잠재적인 것과 해방적인 것」)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시집. 다시 읽으려고 접어 둔 귀퉁이가 자꾸만 무한 증식하는 시집. 현실의 ‘재현’보다 현실을 잠시 보류해 두고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시집. 몰라도 짜증 안 나는 시집.



2. 메모



-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12-13쪽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상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나는 한순간,/ 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를 멈춘다.// 커튼이 날아가버린다. 나는 내가 가까워서 놀란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을 잠그고 있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로// 창문이 비치고 있는 것/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32-33쪽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일요일과 초과 40-41쪽 부분

치마를 펼치고 걷는다. 치마는 펼쳐지지 않고 나를 감는다. 치마가 텅 비어 있도록 다시 치마를 펼친다. 치마에서 나가자.// 슬픔의 발달 이후 여러 개의 손가락이 똑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슬픔이 성사되어 슬픔이 타락한다. 움직이지 않는 신호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일요일// 신호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부서져버린 모퉁이가 너무 커서 모퉁이는 되돌아가지 못하고 부서지는 순간 몇 겹으로 깨어진 방향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치마에서 나가자. 치마의 주름이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지는 날 그렇게 치마는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는 내일을 이해하고야 만다. 눈꺼풀 속에서 눈을 움직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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