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28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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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명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 지성사,



1. 비교적 짧은 시편들로 이루어진 시집. 최근 읽은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 비해 반 정도로 얇은 시집.
화자는 자꾸 ‘벽’ 속으로 들어간다. ‘벽’을 뚫고 다른 세계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 ‘벽’ 속에 산다. ‘금’간 벽 속에서 ‘움직이는 금을/ 그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린다.



‘벽’은 어떤 곳일까? 숨고 싶은 곳,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유배지, 어둠이 공기인 곳, 금기와 금지의 장소가 ‘벽’이다. ‘벽’은 여러 가지로 변주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끊임없이 굴러야 하는 바퀴로, 천장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전등으로, 신발을 신었을 때 뒤꿈치가 신발을 낯설어 해서 얼굴이 붉게 까지는 것, 내 몸속에서 피처럼 돌아다니는 못이나 바늘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리’고, ‘머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가 금지된 곳에서/ 머리카락이 자’란다.


‘벽’이 꼭 부정적인 장소나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 ‘벽’에서 벽의 밖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웃음과 울음, 연필 깎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를 클래식 음악을 듣듯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지금은 웅크리고 베이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지만 어둠으로 가득찬 벽 속에도 미세하지만 밝음과 맑음이 있고, 희망의 실뭉치가 있다. 내 몸속의 바늘을 꺼내 서투르게 상처받은 어둠을 꿰매고 완성된 옷을 이 보잘 것 없는 옷걸이에 거는 일이 남아 있다.



2. 메모

- 금 24-25쪽

마룻바닥/ 내가 앉은 마룻바닥/ 내가 닦아대는 마룻바닥은 금이 간다./ 내 손가락, 내 발바닥은 금이 간다.// 내가 여는 문/ 내가 미끄러지는 타일/ 내가 마주친 벽은 금이 간다./ 나는 금 속으로 들어선다.// 금은 금과 부딪친다./ 금을 부수고/ 금의 시체를 먹으며/ 금은 자란다.// 나는 금을 따라 걷는다./ 금들이 부딪치는 한가운데/ 꽃이 피어 있다./ 나는 몸을 구부린다.// 내가 몸을 구부리자/ 꽃이 많아진다./ 더 작은 꽃/ 더 미세한 꽃들이 피어난다.// 분할되고 분할되고 분할되는 기계들이/ 다시 분할될 준비를 하고 있다./ 더 작은 금/ 더 미세한 금 속으로/ 소용돌이가 되어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금을 긋는다./ 금 속에서/ 움직이는 금을/ 그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린다.



- 금지된 놀이 50-51쪽

머리를 덮으며/ 머리카락이 자랐다.// 아이들은 인형을 던지며 놀았다.// 한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옆집 아이와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머리카락을 덮으며/ 머리카락이 자랐다.// 한 아이가 노는 아이인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아이인 것이 금지되었다.//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날아다녔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인형을 던지며 놀았다.// 한 아이가 금지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금지된 울음과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금지되었다.// 머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가 금지된 곳에서/ 머리카락이 자랐다.



- 면도 52-53쪽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은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96쪽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나는 벽 속에 있었다. (···) 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멀어지는 발자국, 알 수 없는 울부짖음 소리, 나는 시끄러운 정적 속에 묶여 있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닫혀 있는 빗방울, 닫혀진 물이 벽을 흐르고 흘렀다. 벽은 빗방울 속에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며 벽 속에서 나는 말했다. 날 꺼내줘. 도시는 녹고 있었다. 빗물 속에 도시는 녹아들었다. 천천히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날 꺼내줘, 떠내려가며 나는 말했다.




- 데칼코마니 93쪽

땀은 몸 밖으로 난다./ 그리고 몸 안으로도 흐른다.// 밤/ 유리창으로 내가 밖을 바라볼 때/ 유리창에는 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그 유리창을 열어놓는다./ 그 유리창이 저절로 닫힌다.// 처음에 기둥에 못을 몇 개 박은 뒤/ 나는 못을 밟고 올라갔다.// 올라갔다고 머무를 필요는 없다./ 올라갔다고 굳이 내려올 필요는 없다.// 나의 못들을 뺄 필요는 없다.// 어떤 동물들은 뿔이 있다./ 어떤 동물들은 굴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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