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읽고


1. ‘말랑말랑’한 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초딩 입맛을 가진 분이라면 ‘말랑 카우’겠지. 현대사회는 점점 말랑말랑 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 딱딱하고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더해진다. 함민복의 시(詩)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가난’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의 편린이 그의 초기작에 많지만 최근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을 보면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문명에 대한 비판, 생태주의적 가치관, 일상의 소중함, 실존에 대한 고민이 두루 드러난다.



2.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 귀 향(전문) - 30쪽

낯설지 않던 도시를 떠돌다/ 낯선 고향에 돌아왔네// 이땅에 이쯤 살았다면/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 내 나이 수만큼은 흙 속에 묻어주었을 텐데// 문이 문을 여는 빌딩을 기웃거리고/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죽은 고기를 씹고/ 똥물 내리는 물소리나 들으며/ 풀 냄새라곤 담배 냄새나 맡다가//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사십이 다 되어 홀로 돌아와/ 살아온 길 잠시 벗어 보네/ 낯선 고향에서 쉬이 잠이 오지 않네

: 별 다른 해설이 필요없는 시다. ‘문이 문을 여는 빌딩’은 아마도 자동문을 있는 대형빌딩을 의미할 것이다. 문을 여는 행위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는 의미인데, 손으로 문을 연다는 것은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는 행위다. 수험생의 방에 문을 열 때는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화가 났을 때는 쾅! 연다. 그런데 ‘자동문’은 손이 아닌 ‘문이 문을 여는’ 문이다. 거기에는 감각이 거세된 규칙적이고 자동화된 행위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손을 잃었다.



3. - 백미러- 부분 34쪽

어깨 위에서 도끼날이 번쩍 햇살을 찍는다/찍힌 하늘 속으로 돼지 비명이/ 길게 빨려 들어간다// 그가 쓰러졌다/ 달려오던 트럭 백미러에 머리를 부딪쳐/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중환자실에서/ 백미러는 자꾸 도끼날이 되었다/ 이차 수술 결과가 좋아야 식물인간이 된다고 했다/ 식물이란 말이 가장 무섭게 들리던/ 진단을 깨고/ 그가 일주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중략)

혹// 죽였던 돼지를 만나/ 잡았던 개를 만나/ 밧줄을 풀고/ 함몰된 머리를 보듬고/ 멱 속으로 피를 다시 집어넣고/ 꿰매며/ 단지 생활난 탓이었다고/ 수십 석 볍씨를 논바닥에 토하고 온 것은 아닐까// 백미러처럼// 도축장으로 죽으러 가는 돼지 한 트럭

: ‘식물이란 말이 가장 무섭게’ 들린다는 감각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4. - 뿌리의 힘- 54쪽

서울서 면도하고 고향 와/ 턱 만지니 꺼끌꺼끌// 강철 면도날 수백 개/ 밀어 온 수염// 뿌리의 힘// 날려고 그림자 떼어버렸던 구름/ 낙향하는 눈보라// 앉아서 죽은 아버지와 같이 쓰러지던/ 흰 수염의 검은 그림자

: 1, 2연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 ‘뿌리의 힘’은 ‘강철 면도날 수백 개’를 밀어온 세월의 힘이다. 날려고 발버둥 쳤던 젊은 시절도 지나고 낙향하는 중년, 이미 중년을 겪어 하늘로 올라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는 시다.


5. - 일식 - 56쪽 부분

햇살 아래서// 눈물을/ 한두 번 찍었을// 女人의 가녀린/ 반지 낀 손가락/ 끌어 입술에 대보고 싶은// 그래/ 그림자도 빛반지를 저리 껴 보는구나


6. - 감촉여행- 80쪽 부분

도시는 딱딱하다/점점 더 딱딱해진다/뜨거워진다



7. - 김포평야 - 부분 74쪽 부분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은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중략)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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