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추덕영 그림 / 대상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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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통증도 희망이다 (함민복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고)

‪#‎함민복‬ ‪#‎미안한마음‬ ‪#‎통증‬

1. 강화도에 사는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의 한 장(章)의 제목이자, 그 안에 수록된 에피소드에 나오는 말을 메모해 두었다.


-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문학담당 기자와 술을 먹었다. IMF 시대라 상금이 없어졌고 하여 동으로 된 조각품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쌀로 한 서 말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내가 중얼거린 말이 기사화되었었다. 그 기사를 보고 쌀 세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주셨던 신농백초한의원 님들 덕분에 보일러에 기름 두 드럼 넣고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세상에 고마워할 일이 이렇게 많구나.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을 되새겨주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마저 일깨워주니 통증도 희망이다. 78쪽



'통증도 희망이다'라는 말에서 애달프고 미안한 마음은 '도'라는 조사에 숨어 있다. '통증은 희망이다'라고 했다면 단정적으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꼰대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은'대신 '도'라는 조사는 맘을 애잔하게 녹였다. 통증은 피할 수 없기에 받아들여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통증에서라도 희망을 보고픈 마음, 너무 아프면 통증조차 없으니까 난 아직 덜 아파 다행이라는 자조와 안심이 조금은 베여 있다.



2. 통증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 아픈데도 안아픈척 웃어도 사람들은 다 안다. 아프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가와 진심이든 겉치레든 위로의 말을 건네기라도 하지만 웃는 사람에게는 지켜보는 사람도 어찌할바를 모른다.

친한 동기가 내년 4월 16일에 안동에서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어, 그날 세월호 침몰한 날인데?"
"뭐야~, 왜 그런말을 해, 어쩐지 나도 날짜가 익숙하더라."
"결혼식엔 꼭 갈게 그래두"

농담으로 한 말인데, 괜한 말을 했나 맘에 걸린다. 통증없는 양심보다는 불치병에 걸린 양심을 가지고 흰 눈 덮인 산길의 발자국 따라 발맘발맘 걸어가고 싶다.




*** 흔들린다(12-13쪽, 전문) 


집에 그늘이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이직하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 뱃길은 아무리 다녀도 다져지지 않습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말랑한 생살로 된 길입니다. 먼지가 나지 않는 길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고기가 다니는 길을 쫓아다니는 길이니 물고기가 만들어준 길이기도 합니다. 39쪽



-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문학담당 기자와 술을 먹었다. IMF 시대라 상금이 없어졌고 하여 동으로 된 조각품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쌀로 한 서 말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내가 중얼거린 말이 기사화되었었다. 그 기사를 보고 쌀 세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주셨던 신농백초한의원 님들 덕분에 보일러에 기름 두 드럼 넣고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세상에 고마워할 일이 이렇게 많구나.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을 되새겨주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마저 일깨워주니 통증도 희망이다. 78쪽


- 소스라치다(91쪽, 전문)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 생명들



-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폭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펜션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대개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당당히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회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서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집고, 새싹 비빔밥, 불타는 닭갈비... 등,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너무 잔인한 음식점 이름이 우리 주위에는 수두룩하다. (115쪽)


- 김포평야(122-123쪽, 전문)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 불사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 꽃은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를 비춰주지 않는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가 다 꽃으로 보이는 이상한 거울이다. 꽃향기는 끌어당긴다. 꽃향기에 밀쳐진 경험 한 번도 없다. 꽃은 주위를 가볍게 들어 올려 준다. 꽃 앞에 서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마음은 꽃에 여닫히는 자동문이다. 꽃잎을 만져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아. 빛깔도 참 곱다.' 빛깔을 만질 수 있다니, 빛깔을 만질 수도 있게 해주다니. 사람들을 다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꽃은 봄의 심지다. 157쪽


- (n형에게 편지글 중) 173-174쪽


 지난 번 어때 다친 일 때문에 고향을 못 가신 것은 아닌지요. 형도 저처럼 혼자 살아 파스 붙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 어깨가 결릴 때 파스를 방바닥에 놓고 손거울 보며 낙법하지 마세요. 한 장 남은 파스 엉뚱한 데 붙어버리면 슬퍼지니까요. 파스를 양면테이프로 벽에 붙여놓고 등짝을 조정해서 붙여보세요. 좀 나을 겁니다. 빨리 찾아뵙고 파스라도 한 장 붙여 드려야 하는데, 사는 게 이리 맘과 다릅니다. (중략)


 날씨가 추우니 곧 봄이 오겠지요. 정릉 계곡에 벚꽃 흩날리던 봄이 생각나는군요. 형 루이 봄에 한번 만나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병술년이라고 병술 먹지 말고 기분 좋게 꽃술 몇 잔 들어요. 이곳 섬에서 숭어회도 좀 떠갈게요. 형도 열심히 살라고 제 등짝 한번 탁, 쳐주세요. 형의 '손 파스'만 한 힘이 어디 또 있겠어요.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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