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32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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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최현우라는 시인은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등단작에서부터 그런 기미가 보였지만 시집에서 접어둔 시들은 한결같이 대상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물의 시선이 담긴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물구나무'에서 그릇이라는 대상에 대해 몸의 확장(원효의 해골도 연상되고)이 되었다가 시장의 야바위 판에서 조그마한 사발들이 바삐 움직이며 사람의 시선을 현혹하는 장면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장면들. 기발하고 엉뚱한 공상과 상상 대신 오랜 관찰과 그 견딤에 신뢰가 간다.





- 시인의 말

슬프고 끔찍한 일들은/ 꼭 내가 만든 소원 같아서/ 누군가 다정할 때면 도망치고 싶었다.//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스물의 나를/ 서른의 내가 닫고서// 턱까지 숨이 차서 돌아가면/ 당신이 늘 없었다.





- 남다, 담다 32-33쪽


남겨진 것에 뚜껑을 덮으면/ 담겨진다// 시간을 나룰 줄 몰랐던 때에/ 밤은 하루를 닫기 위해 덮어버린 절대적인 손바닥이었다/ 주술을 하는 사람들은 불을 지펴 어둠을 밀어내며 신의 일부를 연다고 믿었다// (···)// 건드리지 않았는데 컵이 떨어져 깨지면/ 눈물을 닫아야 할 때/ 액체가 된 날과/ 고체가 된 날// 아무리 주문을 외고 제사를 치러도/ 나는 나에게서 불현 듯 쏟아진다// 영혼에 홈이 가득 패어 있는 사람은/ 매일 밤 마음과 시간을 반대로 돌려 끼우려 했던 사람이다




- 물구나무 36-37쪽


오래전부터 두개골은 완벽한 그릇이었다/ 처음 죽은 인류의 머리를 받아들고/ 물가에서 장례를 치르던 자의 생각/ 이것으로 물을 떠 마실 수 있겠다,/ 두 손보다 많은 음식을 쥐고 먹을 수 있겠다,/ 그렇게 그릇을 발견한 자는/ 짐승을 죽일 때 머리를 때리지 않았다// 설계자의 심중은 모르더라도/ 그는 야바위꾼/ 그릇들의 춤이 보고 싶었을 것/ 머리를 땅에 박아대는/ 인간들, 인간들 보며/ 한바탕 웃고 싶었을 것// 휘젓는 손을 시간이라 부를까/ 이리저리 엎어져 있게 하다가/ 내내 감추고 있게 하다가/ 딱 한 번 뒤집어버리는// (···)




- 목각 인형 48-49쪽


죽은 다음에도 살에 살을 끼워 물고 놓지 않는다면/ 빛과 잠을 섞는 저녁의 흔들의자/ 팔꿈치를 받쳐놓아도 차갑지 않은 티 테이블/ 숨어 놀다 잠든 아이의 이불 장롱처럼/ 조금 더 너랑 살겠지만,// (···)// 어디로도 가지 않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물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에는/ 영혼 대신 페인트를 바른/ 하나의 표정/ 하나의 표면// 이 넓은 밤은 누구의 빈집일까/ 발견되고 싶어서/ 뛰어내린 바닥에는 어째서 아직 닿지 않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나를 물고 놓지 않는다면/ 조금은 더 / 너랑 살 수 있겠지만


- 어쩌면 너무 분명한 50-51쪽


나 만지며 너 생각하면/ 아무래도 몸은 몸이 아닌 거 같아서// 기억의 주형 속으로 부어넣은 것들 세워놓으면/ 새벽의 공원/ 비를 맞고 온몸이 어두워지는 청동의 사람/ 금속으로 만든 주름, 백 년을 늙지 않는/ 어쩌면 너무 분명한/ 아, 그러니까 어쩌면// 멀리서 빛나는 창문이 있었다/ 그림자가 춤을 추며 불빛을 흔들 때/ 내게도 움직이는 음악을 따라/ 어설프게 흉내하는 사람의 동작이 있었다// 나를 잘라 팔면 돼/ 울지 마// (···)// 발치에 꽃을 두고 사라지는 누군가/ 그 뒷면을 오래 보면/ 길고 어두운 모양이 눈동자로 옮겨 붙는다/ 이제 마음도 구체적으로 사라질 차례// 팔을 떼어 녹였다/ 귀와 코를 잘라주었다/ 왼발은 왼발 없는 자에게 건네고/ 피부를 빵으로 바꾸어 먹였다// 울지마, 라는 말을/ 몸을 잘라 해야 하는 사람// 너를 생각혀면/ 나를 만질 때마다/ 아무래도 살았다는 게 살 수가 없어서




- 최현우, 발레리나, 91쪽(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놓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 발레의 점프동작


심사평) 시에서 계절로부터 ‘부슬비’의 가는 발목을 발견하거나 바람으로부터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원시의 무용을 발견하는 응시의 시선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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