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시인 K-포엣 시리즈 9
김중일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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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에서 보여주었던 반성과 애도의 사회적 확장이 이제는 시인과 시씀으로까지 확대된 것 같다. 부록으로 실린 시인노트와 시인 에세이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시는 앞으로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투명한 존재'들에 대한 헌사와 매개로 이루어질 것이다. 섬세하게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이미지로 삶과 죽음, 땅과 하늘, 이곳과 저곳,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늘지만

단단한 실끈 같은 그의 시들. 


 

 

 

시인 에세이) ‘내가 쓴 시는 누가 쓴 시일까’

 

나는 지금 망자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으나 투명한 것들은 충분히 많다. (중략) 지구상에 투명한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무한한 영역을 말이다.

나는 앞으로 꾸준히 투명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략) 다만 곁에 있지 않아 눈앞에 없는 존재 그래서 투명한 존재,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는 존재, 끝내 서로 그리워해야 하는 존재를 좇으려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운 사람은 투명한 사람이다. 다만 그들은 나와 시차를 두고 113쪽 살아간다.

 


- 시인의 등

 

시인의 등을 끌어안으면, 나는 시인의 거대한 가방이 된다. 시인은 간혹 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내 몸속에 손을 넣어 휘적거리다가 몇 권의 시집들 사이에서 물병 하나를 찾아내어 목을 축인다. / 시인의 등을 끌어안으면, 나는 어느새 온몸으로 서리 낀 차가운 창문을 껴안고 있다. 23쪽

 

- 무의미(-시인의 죽음)

 

낡고 오래된 시집 속에서 검고 딱딱한 껍질을 가진 활자들이 사납게 날아오르는 줄만 알았는데, 그것은 죽은 모체에서 나와 딱딱한 활자를 알껍질처럼 깨고 드디어 부화한 시적 의미들이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시적 의미들은 시인이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시인의 육체를 삼키며 검게 피어올랐다./ 시인을 삼킨 의미들은/ 시인과 함께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졌다. 32쪽

 

- 새의 무릎 54-56쪽

 

태중에서 기도하는 태아의 작은 두 손처럼 모은 두 부리로/ 땅을 두드리며 새들은 무릎으로 걷는다/ 새들의 무릎은 늘 까져 있다/ 까진 무릎에서 석양이 흘러나온다/ 새들은 온종일 떠나있던 석양 속으로 돌아간다

 

새들의 무릎에서 발이 돋았다/ 새들은 비바람에 꺾여 나가는 정강이를 붙잡으려 오랜 시간 진화했다/ 결국 새들에서 꺾여 나와 지상에 떨어진 가는 다리는 나뭇가지가 되었다/ 그 마디마다 돋는 꽃들 잎들

 

오래된 베개 속에서 하나씩 밖으로 새털이 빠져나가듯/ 내 몸의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매일 하나 둘 새털들이 비어져 나온다/ 내 몸은 점점 작아지며 주름져간다

 

새들의 무릎에는 향 연기보다 가늘어 보이지도 않는 실 한 가닥이 묶여 있다/ 새들의 일과 : 지구 둘레를 선회하는 것은/ 검은 밤고양이가 실뭉치처럼 가지고 놀던 지구를 다 풀어내는 일/ 얽히고설킨 실뭉치인 지구를 풀어 그동안 죽은 고아들이 덮을 이불을 짜는 일/ 오늘 죽은 아이들을 덮을 새털보다 가볍고 따뜻한 이불의 무게/ 아이들의 영혼이 사흘간만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정확히 그 정도 무게의 이불을 매일매일 짜는 일

 

일과를 마친 새들이 퇴근한 자리/ 바닥에 떨어진 실밥 같은 붉고 노란 꽃들/ 새들의 무릎에 든 멍자국 같은 푸른 잎사귀들

 

- 투명의 경계 78-80쪽

 

죽은 사람, 산 사람들은 투명의 경계를 두고 세계를 절반씩 점유하고 있다/ 산 사람에게 죽은 사람은 투명인간이듯,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첫 죽은 사람이 탄생하는 순간, 투명의 경계가 생기고 세계가 온통 눈앞에 드러났다/ 투명의 경계가 합체되는 순간, 온 세계는 다시 투명해질 것이다/ 지구는 비로소 투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45억 년간 실패한 일이다// (중략)// 그날의 노을, 기억이란/ 투명의 경계가 허물어진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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