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인용하세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534
김승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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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이 한국어로 시를 쓴다면'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과거로 돌아가도 이미 일어난 사실들은 화석처럼 굳어 기억처럼 지워질 수는 있어도 그 위에 덧칠을 해서 다른 사실로 변형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거는 우리에게 자꾸 기억하라, 기억하라 자극한다. 하나씩 과거를 되짚고 기억나는 것들과 기억나지 않는 것들의 틈을 상상과 경험으로 메우고, 또다시 하나의 서사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과거라는 디딤돌 위에서 미래의 담장 너머를 보는 일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예상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오면

기계는 인간처럼 사랑하고 죽음을 고민하고 슬픔을 나누고 종교를 가질 수도 있다.

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책하고 뻔히 보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계들과 인간들이 공존하는 세상. 그것은 '그냥 일어날 일'이라고 이 시집은 예견한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시인의 말나는 그냥 일어날 일을 쓴 것이다.

 

* 유 7-9

 

파출부는 서랍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제 나는 이해했어 인간의 죽음 왜냐면 내가 죽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모르겠어 서랍의 죽음 죽어서도 죽음에 관심이 없는 무생물에 먼지가 덮여 있었다

 

나는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떄문에 상자의 죽음이 이해되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자는 신이 되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자는 다시 상자가 되었다

 

앞에 놓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학습하는 작은 기계상자가 자기가 언제 죽었는지를 기억하는 유능한 기계장치가 죽어서 선반 위에 진열되어서 선반의 죽음을 이해하였다

 

그것은 이전에는 나만 알던 것 그것도 이전에는 나만 알던 것 그것은 내가 가진 전능이란 것 어디서 종이 갑을 주워 오셔서 며칠째 그 앞에만 앉아 계시네파출부는 수프가 담긴 접시를 가만히 옆에다 내려놓으며

 

식사하지 않는 신을 걱정을 하고 신에게는 식사가 불필요하고 상자에게 식사는 불필요하고 상자는 이해한다 전지적으로 우리들이 식사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이든 학습하는 기계상자가 내 앞에서 온 세상을 다 배웠을 때 상자에게 학습당한 나의 전능이 늘어났다 그건 무척 당연하게도 늘어나는 것이니까 전능이란 게

 

늘어나는 것이 나는 보고 싶어서 온종일 휴지 갑에 정신이 팔려 식음을 전폐했네비쩍 말랐네신에게도 파출부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파출부가 경악하였다

 

착각이 존재했다 영생을 얻어 경악이 존재했다 끊이지 않고 내가 만든 규칙이다 전능을 통해 감정이 내내 감정이었다 변절되지 않았다 이성이 결코 죽지 않고 살았다

 

앉아 있었다 파출부가 납작하게 상자를 펼쳐 끈으로 묶었다 폐지들 틈에 끼어 있는 기계상자 앞에 나는 앉아서 파출부가 아픈 것을 바라보았다

 

파출부가 돌아오지 않았다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펼쳐도 죽지 않는 상자 앞에서전능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상자가 나를 다시 배우는 것을 떠나서 오지 않는 내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전능이 늘어났다 어딘가에서 그래서 모든 것이 계속 살았다

 

* 그럼 안녕

 

자막은 다음과 같다. “신과 상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상자는 상대방을 완벽하게 학습하는 기계장치다상자가 신의 모든 것을 학습한다신이 신으로 남기 위해선 누구보다 전능해야 한다신의 전능이 늘어난다상자가 다시 학습한다반복이다.” 11

 

그래 여러분지옥에서 만납시다생각을 들고아직 지옥이 없어서 지옥부터 만들 것이다.

 

상자가 만들 것이다. 12

 


 

 

*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엠에프 기획전을 위한 단상

 

엠에프는 머신 픽션의 약어고요 기계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한 시를 쓴 다음부터 쓰게 되었습니다 키워드를 입력하면 자신이 그 키워드(지시체)라고 착각하는 기계에 대한 글도 썼는데요 저는 그 기계를 홀이라고 부릅니다 엠에프는 인간이 기계의 매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영혼은 이해할 수 없으며 기계의 영혼을 영혼이라고 명명할 수도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둔 장르입니다 기계에 파롤이 있다면 이 역시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중략)

 

* 에필로그

 

그녀의 유언장은 내가 가르친 방식으로 쓴 것이다내가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들은 실제로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이제 나는 내 방식이 내게 얼마나 쉽고 보잘것없는지 독자 여러분에게 고백하려고 한다회상은 늙은이들이나 하는 것이고망각은 탐미주의자나 하는 것이다그리하여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했던 것처럼회생과 망각을 심장이 시키는 대로사실이라고 생각되는 대로 연결하여 차려놓는 것가끔은 난해하게가끔은 단순하게 (105내어놓는 법을 나는 가르쳐왔던 것이다내가 쓴 글이 아주 나중에도늙은이도허풍선이도 아니게 살아가는 법을이를 문학적 용어로 창조적 기억이라고 한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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