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공지영.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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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은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이 두려웠다.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정색을 하고 논쟁을 벌이려는 사람들을 항상 차가운 눈길로 보았다. 유치하지만 결실 없는 논쟁을 하기보다 침묵을 지키는 쪽이 훨씬 힘있다고 믿고 있었다.
츠지 히토나리, p.16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쓸쓸함은 사랑을 약하게 만든다.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과 같았다.
츠지 히토나리, p.89
 
시간을 보니 약속한 시간에서 이십오 분이나 지나 있었다. 내 자신이 싫어지는 때가 이런 때다. 늘 하던 실수를 늘 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심지어 그것에 뻔뻔해지지도 못할 때, 하지만 다음번에 그 순간이 온대도 내가 결국은 그 실수를 또 하고야 말 거라는 걸 알 때.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결심을 하거나 구호를 한 달쯤 외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거나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늘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의 결점들을 그렇게 보게 될 때. 그리고 내가 고작 거기까지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서 또 깨닫게 될 때.
공지영, p.85
 
"괜찮다, 괜찮아. 홍아, 네 나이 때는 정답을 못 찾는 게 정답이야. 모범 답안으로만 살면 진짜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거야."
공지영, p.132
 
 
츠지 히토나리, <사랑후에 오는 것들> 中
공지영, <사랑후에 오는 것들> 中
 
 
+) <사랑후에 오는 것들>은 일본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에 관한 이야기다. 츠지 히토나리는 작가를 지망하는 일본인 남자의 시점으로 서술하고, 공지영은 일본에 유학간 한국인 여대생의 시점으로 서술한다. 처음에 책을 구입했을 때 무엇부터 읽어야 하는가 고민했는데, 나는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먼저 선택했다. 만약 공지영의 책부터 읽었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이 두 권의 소설은 한일 관례를 돌아보는 시기에 쓰여진 것 같다. 그러나 꼭 한일 관계에 얽매여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이에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차분히 조명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으로서,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준고'는 사랑하는 '홍이'를 만나 시련의 상처를 잊고 영원히 사랑하리란 생각을 한다. '홍이'는 유학을 가서 만난 일본인 남자를 사랑해서 한국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할 것 같으나 각자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므로 문제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가난한 준고와 넉넉한 홍이, 늘 아르바이트에 쫓기는 준고와 늘 외로움에 시달리는 홍이, 미안한다는 사과 한 마디도 표현하기 어려운 준고와 단 한 마디의 사과를 기다리는 홍이. 그들의 문제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너무나 쉽게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7년 뒤, 한국에서 기적처럼 재회하게 된다.
 
남자의 입장과 여자의 입장을 듣게 되면서 각자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해라는 것은 대화에서 생길 수도 있지만 침묵에서 생길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표현해야 하고, 때로 절제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피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소한 말이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침묵이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소설이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대방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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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당선작품집 소설
김성진 외 지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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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Y에 대한 내 마음이 모멸감뿐일지라도 그를 생각하면 빈속에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속이 쓰리다. 사랑이나 행복이란 감정은 그 정도가 강할수록 휘발성도 강하다.
- [첫 번째 생일]
 
드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해라는 건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은 태생적으로 갖지 못했다.
- [비정상궤도]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갇힌다.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말을 나눈다는 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의지이고, 시작은 그게 무엇이든 변화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 [방]
 
목적지도 없이, 그것도 새벽 3시란 시간에 동네를 어슬렁대는 것은 짝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나의 감정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나는 문득 외롭기도 했다가 갑자기 서럽기도 했다가 느닷없이 의욕이 생기기도 했다가 결국엔 허무하기도 했다가 나중엔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 [우유 의식]
 
한국소설가협회, <2008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소설>
 
 
+) 한 신문사의 심사위원들은 정통한 소설기법으로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을 제외했다고 말했다. 너무나 모범답안 같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신인문학상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이유이다. 옳은 말이나 위험한 말이다.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 최근의 소설들은 독특한 소재를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란 생각을 했다. 독특한 아이템을 인물과 구성에 녹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의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않으면 재치있는 신인 작가 지망생의 글에 불과할 것이다.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은 사람과 삶의 이야기이다. 글쓰기의 잔재주만으로 소설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삶의 깊이와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야 옳다. 그것에 견고하고 치밀한 상상력과 자연스러운 구성 능력, 매끄러운 문체가 덧붙여져야 좋은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는 못한다. 그런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매번 신춘문예 당선작품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모처럼 신선한 작품을 접해서 새로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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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양윤옥 옮김, 원성희 그림 / 좋은생각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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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도 중학교 때 장난이라면 꽤 쳐본 사람이다. 그러나 "누가 이랬어?" 했을 때 내가 안 했다고 잡아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건 한 것이고 안 한 건 안 한 것이다. 나란 놈은 장난을 쳤어도 거리낄 게 없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을 하지 말 일이다. 장난과 벌은 붙어다니는 것이다. 벌이 있으니까 장난 칠 마음도 생기는 거지. 장난은 실컷 쳐놓고 벌은 안받으려고 피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가. 돈은 빌리면서 갚아야 될 땐 오리발 내미는 비열한 놈들은 모두 이런 녀석들이 어릴 적 버릇 못 버리고 자라서 하는 짓거리다.
p.58
 
"물론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만 자기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p.80
 
 참, 이 세상은 정말 이상한 사람투성이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인가 보다. 신물이 난다.
 세상이 이러니 지지 않겠다고 각오하고서 세상 돌아가는 데 맞추지 않으면 못 견뎌낼 모양이다. 치기꾼을 등쳐먹고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사는 것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지만 젊은 놈이 목이라도 맨다면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게다가 세상에 창피스러운 일이다.
p.103
 
세상을 살면서 괴롭다고 느낄 땐 그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의식의 내용에 변화를 주지 않을 정도의 괴로움은 없다. 산다는 건 활동하고 있다는 말일진대, 살아 있으면서 활동을 억압당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의미를 잃는 것으로 그 상실을 자각하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없다.
ㅡ [런던탑] p.256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中
 
 
+)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시인]에 등장하던 어린 꼬마 소녀를 기억하는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등장하는 옥희 또한 기억하는가. 왜 나는 [도련님]을 읽고 그들을 떠올렸을까. 작중 화자인 '나'(도련님)의 어린 시절 회상으로 그랬을 수도 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성인이 된 뒤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도련님의 모습에서 그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솔직함이, 때로는 무지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부치는 순진함이 그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성인이 저렇게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어린 소년이 성인이 되는 정신적인 성숙의 과정을 재미있게 그린 작품이다. 읽으면서 누가 선생님이고, 누가 학생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화자의 목소리가 웃음을 자아낸다. 단순하고 솔직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도련님을 친손자처럼 보살피는 '기요'. 화자는 기요의 소중함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입장에 서서야 자신을 아껴준 인물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아직은 어른스럽지 못한 도련님의 태도는 청소년기를 거쳐 사회에 진입하게 되는 앳된 인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련님의 깨달음이 세상과 사회에 들어서는 체험으로 형상화된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회 생활과 인간 관계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어린아이같은 솔직함을 갖고 있는 도련님이 부럽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의 말대로 솔직한 사람이기에 비겁한 것을 모르는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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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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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ㅡ [달려라, 아비]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 ㅡ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ㅡ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ㅡ[나는 편의점에 간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 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문득 나는, 언젠가 사촌형과 함께 음악을 들었던 날도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은, 그걸 언제 다 고쳐놓았던 것일까?
ㅡ[스카이 콩콩]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ㅡ[영원한 화자]
 
김애란, <달려라, 아비> 中
 
 
+)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상상만으로 이런 단편들을 써낸 것이리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만약, 김애란의 소설 속 화자가 그녀와 어떤 연계점을 갖고 있다면 나는 과감히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가끔 상상하던 것들이 소설로 그려졌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영원한 화자]의 '화자'는 나란 인간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춰 그의 심리를 무장 해제한 작가의 눈높이에 절실히 공감하기에 가능하다. 김애란의 작품을 논할 때 '아비(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 로망스'를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점이기는 하나 나는 가족 안의 한 개인에 중점을 두고 싶다. 그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가족 공동체의 운명을 대변하고 때로 사회 공동체의 움직임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앞서 개인, 가족 안의 개인, 개인과 또 다른 개인(자아와 타자) 등 김애란의 소설에 논의되는 것은 기존의 가족 서사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이 되리라 생각된다. 가족 혹은 사회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 작가가 서 있다. 가족이 타인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것이 편의점 판매원이 단골 손님을 몰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 남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이다. 이제 작가의 소설에서 가족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로 요약되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김애란은 그 점을 잘 지적한다. 유쾌하게 읽은 소설이다. 인물들의 구도와 상황 설정을 재미있게 정함으로써 소설집 도처에 웃음이 넘쳐난다. 지루한 날 마음편히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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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8-2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쓸쓸하지만, 잘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 나온 <침이 고인다>는 아직

못 봤는데 궁금하네요.

우비소녀 2009-08-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침이 고인다,도 한번 읽어보세요. 생각보다 김애란이란 소설가, 탄탄한 문체와 구성진 사유구조가 꽤 멋지답니다^^
 
2007 젊은 소설
김미월 외 지음 / 문학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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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어란 정말 몹쓸 것이며, 악덕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말이란 한 번 뱉고 나면 농구공처럼 퉁겨져 다시 이쪽으로 날아온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피하면 피하는 대로 날아오는 것이 말의 속성이다. 그는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언어의 비밀을 농구선수라는 단어를 통해 깨우친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언어의 심각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해보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농구에 대한 과도한 과민반응에 시달렸을 뿐이다. 그날 이후 한동안 농구공을 껴안고 자야만 했다.
- 김태용, [중력은 고마워]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된다. 돈도 안 되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 내 상황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런 걸 왜 하고 있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돈 되는 음악도 많은데. 돈 되는 음악을 하는 건 쉬운 줄 알아? 라고 말들 하지만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려면 얼마나 미쳐야 되는지를 안다면 꼼짝도 못 할 것이다. 바보들이 모르는 건 본질이다. 음악의 본질은 진짜 노래하는 것이고, 의약의 본질은 인류의 고통과 진짜 싸우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박상, [치통, 락소년, 꽃나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상의 속도, 그리고 정상보다 빠른 속도. 정상보다 느린 속도로 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느린 것은 빠른 것보다는 덜 두려운 일일 것이었다. 어느 한쪽만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간다는 사실에 나는 진저리가 쳐지곤 했다.
- 염승숙, [춤추는 핀업걸]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밤중에 혼자 깨어,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린애의 외로움 같은 거야. 둘이 있어도 외롭다면 그건 처참하지만, 완전한 외로움은 아니지. 둘은 어쨌든 가끔이나마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 윤이형, [셋을 위한 왈츠]
 
김미월 외, <2007 젊은 소설> 中
 
 
+) 젊은 소설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신춘문예, 전통문예지 당선 소설가(3년차) 문제소설'로 엮어져 매년 발행된다. 말그대로 최근 젊은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살펴보고 싶어서 읽어보았다. 이 책에는 평론가 김종욱, 최성실, 이수형의 선정으로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작가는 대부분 2004년~2006년 사이 데뷔한 사람들이다. 내 기대에 부응할 작품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꽤 많다.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신인 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필치가 내 의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김미월의 [유통기한]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를 그들과 생활하며 천천히 받아들이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통기한을 지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그러니까 삶에서 유통될 수 있는 기한이 중요한 의미가 된다. 정신대 할머니의 삶을 유통기한을 지우듯 삭제하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 우리의 삶에 새긴 유통기한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김이설의 [환상통]은 암을 겪은 딸이 자신처럼 암을 겪는 엄마를 돌보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궁 적출로 아이를 낫지 못하자 이혼을 선언하고 그 순간 자궁이 사라진 곳에 환상통을 느끼게 된다. 암에 걸린 엄마가 결국 죽고 그 부재의 공간에 또 한번 환상통은 찾아온다. 부재의 아픔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태용의 [중력은 고마워]를 읽을 때는 마치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말이 갖고 있는 속성을 농구공에 겹침으로써 펼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다만 언어(말)의 속성이 농구공에 묻혀 가려지는 부분이 살짝 아쉬웠다.
 
박상의 [치통, 락소년, 꽃나무]는 이상의 '꽃나무'와 락음악, 치통을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꽤 포스트모던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느 부분이 사실인지 진심인지 혹은 상상인지 묘사인지 알 수 없도록 섞고 또 섞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오고가는 작품으로 염승숙의 [춤추는 핀업걸]과, 황정은의 [문]이 있다. 황정은의 작품은 죽은 자와의 교감을 환상적으로 그려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의 현실과 연결된다. 죽은 뒤의 세계가 중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대화가 전개된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인 작가들의 소설을 얕잡아 보는 엄청난 실수를 했을까. 고작 한 두번 글을 쓰고 당선한 사람은 없을텐데, 그처럼 어설픈 작품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무엇보다 그들의 탄탄한 글쓰기가 든든했다. 이들이 앞으로 문단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자기만의 뚝심으로 글을 써간다면 좋은 작품이 많이 탄생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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