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ㅡ [달려라, 아비]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 ㅡ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ㅡ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ㅡ[나는 편의점에 간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 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문득 나는, 언젠가 사촌형과 함께 음악을 들었던 날도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은, 그걸 언제 다 고쳐놓았던 것일까?
ㅡ[스카이 콩콩]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ㅡ[영원한 화자]
김애란, <달려라, 아비> 中
+)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상상만으로 이런 단편들을 써낸 것이리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만약, 김애란의 소설 속 화자가 그녀와 어떤 연계점을 갖고 있다면 나는 과감히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가끔 상상하던 것들이 소설로 그려졌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영원한 화자]의 '화자'는 나란 인간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춰 그의 심리를 무장 해제한 작가의 눈높이에 절실히 공감하기에 가능하다. 김애란의 작품을 논할 때 '아비(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 로망스'를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점이기는 하나 나는 가족 안의 한 개인에 중점을 두고 싶다. 그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가족 공동체의 운명을 대변하고 때로 사회 공동체의 움직임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앞서 개인, 가족 안의 개인, 개인과 또 다른 개인(자아와 타자) 등 김애란의 소설에 논의되는 것은 기존의 가족 서사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이 되리라 생각된다. 가족 혹은 사회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 작가가 서 있다. 가족이 타인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것이 편의점 판매원이 단골 손님을 몰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 남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이다. 이제 작가의 소설에서 가족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로 요약되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김애란은 그 점을 잘 지적한다. 유쾌하게 읽은 소설이다. 인물들의 구도와 상황 설정을 재미있게 정함으로써 소설집 도처에 웃음이 넘쳐난다. 지루한 날 마음편히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