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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ㅣ 창비시선 271
박연준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얼음을 주세요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박연준,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中
+) 어쩌면 요즘 여성 시인들은 여성의 '몸'에 대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의미가 환상적인 것이든, 고상한 것이든 간에 그것이 본래 유지하고 있는 의미보다 더 부가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 시어가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그것이 더 묵직해진 것은 아닐까 안타까웠다.
여성성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여성적'이라고 관습적으로 말하는 특성들을 포괄적으로 말하거나, 가정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역할이나 위치, 혹은 수동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것들을 언급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남성중심적 질서 아래에서 '여성성'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성차를 유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시에서 꾸준히 여성성을 재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박연준의 이번 시집은 가장 먼저 여성의 몸을 상징화하는 것이 눈에 띈다. 보편적인 여성의 역할, 그러니까 어머니로서의(모체로의) 위치나 한 가정의 딸의 역할, 그리고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나열된다.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나, 여성의 생리혈, 여성의 육체("피, 선혈, 빨간 양수, 붉은 흙" 등) 등을 통해 여성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존재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아닐까. 화자는 수없이 아버지를 되뇌이는데, 그 모습에는 분노 및 경멸의 시선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움, 연민의 눈빛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죽음을 사이에 둔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이미 죽은 당신이 자꾸 죽을까봐 겁내는/나는, 이마에 못이 박힌 스물다섯"[스물다섯]) 그것은 마치 시인이 독백체로 드러내는 한편의 자서 같다.
이 시집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화자의 생과 함께 성장한다. 그 존재의미 자체가 화자를 고통스럽게 만들며 때로 절망하게도, 슬프게도 만든다. 아마 여기서 화자의 여성성이 본래의 것보다 훨씬 묵직하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어머니에게 있어선 한 남자이자 화자에게 있어선 아버지였던 남자로 인해, 시인은 대조적으로 여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때문에 시적 화자는 생에서 도망치고, 은밀히 숨기며, 비명을 지르며, 자기 안에 홀로 갇힌다. 그것은 스물 다섯이 되기까지 거쳐온 여자의 삶이다. 그 안에서 맴돌던 여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택한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그 여성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의 무게가 본래의 것보다 묵직하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을 신성화하거나(물론 박연준의 시집에서는 거기까지는 아니다) 특별히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소재들의 활용이 이 시인의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틀에 박힌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약간 틀어 옆 길로 걸어가보면 어떨까. 그럼 한결 시집을 읽는데 편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