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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꽃집 ㅣ 창비시선 275
김중일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가문비냉장고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가르릉거린다 더둠이 같은 푸른 털은 공중을 잡아당긴다 부유하던 얼굴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찬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 열고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 오르는 무덥,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김중일, 『국경꽃집』中
+) 김중일의 시집에는 '시간의 퇴행' 흔적이 남아 있다. 화자는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고민한다. "나는 왜 이곳을 지키게 되었는가? 이곳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곳인가?"[구름이 구워지는 상점] 벽시계가 걸려 있는 자리를 보듬어 쓰다듬으며 기억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오늘도 플라타너스는 기억의 저층에 거대한 뿌리를 두고, 집집마다 내걸린 시계들 한가운데로 가지를 뻗고 있다."[시간의 동력]
시간과 기억은 화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집집마다 살고 있는 존재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시간의 해방군으로부터 마을이 점령당하"면 사람들은 "더듬이가 잘려나간 귀뚜라미처럼 숨어서 울어야" 했다. 나아갈 길을 모르고 지나온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잃어버리면서 기억도 잃어버린다.[해바라기 전쟁]
사람들은 "마법사"를 만나 골목과 골목을 이어 지구를 지킨다. "마법사의 가장 훌륭한 속임수는 / 모자속에서 이 골목을 내일로 꺼내놓는 일"이다. 그는 "골목을 모자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거짓말"도 잘한다.[마술사와 모자] "지금이 몇시쯤 됐을까요?"라는 질문은 의미없는 것이다. 한쪽이 자꾸 허물어지듯, 시간도 지나온 자취도 사라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거짓말을 듣는 사람 모두 거짓말쟁이다.[담장 속으로] 시인이 존재하는 지구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맞물림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선택한 것이다. 그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꾸려가고 있다. 시간의 퇴행을 경험하면서 '알바도르 살리'처럼 '기억의 영속'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K는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 오랫동안 / 이 거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 이미 깊숙이 지상에 못 박힌 자신이 / 마법양탄자처럼 날고 싶은 거리를 이제껏 / 단단히 봉인하고 있었다는 것을"[위험한 거리])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일이란 이름의 희망일까. 오늘에 대한 거부일까. "내일로 간다네 불귀 다른 데는 다 가도, 오늘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불귀 긴 야간비행 끝에 다다른, 먼 대륙이 다시 오늘이라면, 이건 정말이지 지루한 여행이구나"[불귀] 어쩌면 그는 정말로 "부메랑"같은 삶이 싫은지도 모른다. 다시 되돌아오는 길, 그 길에서 그가 느끼는 "권태"가 낯설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것들의 반복, 더 정확히 시간의 반복 틈에서 그는 "기억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만"한다고 주장한다. [Sweet lime village] 시간의 일탈을 꿈꾸면서 기억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일상에서 그가 찾는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