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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평점 :
홀로 생존한 저자의 아픔과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소설입니다.
읽는 내내 먹먹함과 쓸쓸함이 뒤섞여 처절하고도 암울한 분위기였지만,
히틀러의 음식을 먼저 먹어봐야 하는 여성들의 삶이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에
숨겨져 있던 역사의 한 부분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내 유년시절은 비밀과 잘못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 비밀을 지키는 데만 열중해서
다른 사람들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유 가격이 수백 마르크에서 나중에는
수백만 마르크까지 폭등하는 동안에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대체 어디서 우유를
구해오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_1부_37
놀랍게도 이 책은 유대인이 아닌 순수 혈통, 아리아인 '로자 자우어'가 주인공입니다.
히틀러가 그토록 갈구하던 '순수 혈통인' 마저도 이렇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총통이 먹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맛보는 역할'조차 (독을 먹으면 먼저 죽는 겁니다 ㅠ)
유대인에게는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거만과 오만이 느껴져 거북했어요.
"총통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끌려오듯 모인, 10~20대의 여성들은 지정받는 식당에서
히틀러가 먹을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하는데요, 배고픔은 수치심마저 삼키게 합니다.
그리고 다 먹은 후에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죠.
아이를 둔 어린 여성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몰래 토해내기도 하고, 각자의 사연이
맞물리면서 관계를 형성하고 무리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생겨납니다.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지만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항하기로 했다. 친위 대원들이 아니라 내 인생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날 나는 나를 크라우젠도르프에 있는 제3제국의 식당으로 이송하는
버스 안에 앉아서 존재하는 것을 멈췄다. _1부_120
극도의 긴장감을 따라 흘러가는 초반이 지나면서 로맨스가 등장하는데요,
이때부터 책장 넘기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어요 ㅋㅋ 금지된 사랑입니다 ㅠ
로자의 남편은 전쟁터로 떠난 후 실종이 되었는데, 혼자인 그녀에게 나치군 장교인
'치글러' 중위의 구애가 시작되는 시점이거든요. 그녀는 시부모님의 집에서 지냈지만
그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사이가 된 것이에요.
치글러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친위대 장교가 아니라 공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모습으로.
그는 한 걸음 더 내 쪽으로 다가왔고 이번에는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치글러가 더 다가오자 나는 흠칫 놀라
커튼 뒤로 몸을 감추고 숨을 죽였다. _176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의 삶과 전쟁이 가져온 피폐하고도 굴욕적인 생활,
그리고 서서히 무너지는 그녀들을 보며, 읽는 내내 심장이 조여왔습니다.
치글러 중위의 끈질긴 설득과 목숨을 건 대가로 유일하게 그녀 혼자 탈출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감당하기 힘든 안타까움과 슬픔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진짜 스포가 될 것 같아서 참아야겠네요ㅠ
"뭐 그 말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 어쨌든 총통은 그뿐 아니라
가축을 도축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행위라 고기를 먹을 수 없대."
히틀러는 적군에 의한 독살 가능성을 방지하는 완벽한 제도를 만들고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약물에 중독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_99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유대인들의 고통을 담아낸 책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같은 독일인으로 순수 혈통을 가진 아리아인조차도 철저하게 유린 당한
내용으로 나온 책은 처음 봐서 충격이 좀 컸습니다.
히틀러의 또 다른 모습도 곳곳에 묘사되어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어요.
추천하고 싶을 만큼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