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5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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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카고 학파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적 목소리들이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케인즈주의로의 회귀,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숙고 등이 한 방편으로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것도 자유주의의 전면적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힘겨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이론적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는 현 상황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칼 폴라니(Karl Polanyi;1886~1964)’다.

가장 널리 알려진 폴라니의 저작은 <거대한 전환>이다. 그의 초인적인 박학다식의 영향을 받아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거대한 전환>을 일반이 쉽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는 그러한 어려움을 다소나마 완화하기 위한 폴라니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이 짧은 문고판 책에도 폴라니가 가지고 있었던 시장과 노동, 그리고 사회와 경제에 대한 생각이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 있다. 케인즈는 폴라니에 비하면 대단히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며, 경제생활이 인간의 삶을 특정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폴라니는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시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제가 다른 사회영역보다 주도적 위치에서 인간 삶을 규정하게 된 것이 노동과 토지, 화폐의 상품화 때문이라고 봤다. 노동과 토지, 화폐는 본래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폴라니는 이들을 ‘상품허구’라고 말한다.

‘상품허구’가 탄생하기 이전, 즉 전면적인 시장경제체제 이전의 사회에서, 폴라니는 경제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 배태된(embedded)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인간은 경제적 존재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 있듯, 사회적 존재라고 여겼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 배태되어 있던 경제가 전면적 시장경제체제에 이르러 사회적 관계를 압도했고,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명제가 종교적 진리처럼 떠받들어지게 됐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경제체제는 사회 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경제는 본래 사회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개입으로 전국적 규모의 시장이 확고부동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고 보았다. 노동이 상품화 되면서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굶주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시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존재했으며 변모해 왔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주장을 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하에서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 수록된 역자의 폴라니의 삶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이제스트 역시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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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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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사회주의 혁명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테러리스트 들이 알렉세이 대공을 암살하려는 과정을 그렸다. 보리스 아넨코프, 스테판 페도로프, 이반 칼리아예프, 도라 불보프, 알렉세이 부아노프, 대공비, 스쿠라토프 등이 등장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칼리아예프와 스테판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 인식에 대한 간극이다.

칼리아예프와 스테판의 갈등은 현대인이 전쟁과 혁명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역설에 놓여있다. 살인을 용인하는 것, 미래의 가능적 인간을 위하여 현재의 구체적 인간을 희생한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이는 알렉세이 대공과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폭탄을 던져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구체화된다. 수천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공의 어린 조카 한 둘 쯤의 죽음은 용인될 수 있는가.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달성한 혁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수단의 불의를 용납한다는 것은 혁명의 정신적 실패를 그 원칙으로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단의 순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또한 그 역사적 성공을 그 원칙에서부터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피에르 앙리 시몽)

역사적 성공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수단의 비순수성을 개인이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순수의 온전한 극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할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내가 죽음을 통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할 때, 비로소, 타인의 죽음에 대항해서 나의 '순수성'을 논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이 근거 역시 아주 희미한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칼리아예프는 “이념을 위하여 죽는 것은 이념과 같은 눈높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행위에 대한 정당화의 방식”이라고 한다.

칼리아예프의 이 논리를 따라가면, 역사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개인에게 죽음이 곧 최선이다. 도라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 죽음이라면 우리가 택한 길은 옳지 못해. 옳은 길은 생명으로, 태양으로 인도하는 길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칼리아예프가 말한 '이념의 눈높이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되물음이다.

인간적 정의와 행복 사이의 갈등. 찢어진 의식의 심장부에서 스테판과 칼리아예프, 도라는 서로의 주변을 부지런히 맴돌고, 서로 부딪힌다.

한편, 칼리아예프와 도라 사이의 깊은 사랑을 아주 조금밖에 감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책의 해설 부분에 있었다. 작품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카뮈가 주제를 너무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글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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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결정과 발발 나남신서 477
박명림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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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관한한 기존에 알려진 가장 권위있는 저서로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 of Korean War>을 들 수 있다. 중국학과 일본학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던 미국내 한국학의 수준을 커밍스는 '기원'을 통해 대번에 끌어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 이는 다른 한국학 연구자들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장벽으로 느껴졌으리라 여겨진다. 커밍스의 저작을 능가하는 혹은 그 수준에 준하는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할 때,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 출간됐다. 

이 책에서 유독 돋보이는 지점은 저자의 학자적 성실성이다. 오래된 과거의 사실, 한국전쟁은 소수 권력자들 내부의 은밀한 회의를 통해 일어났다. 그 은밀성에 힘입어 전쟁의 발발과정을 추적하기 위한 자료수집은 까다롭고 지난한 과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1950년을 전후로 한 당시의 수많은 자료를 섭렵했고, 동시에 꼼꼼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고 해서 그 저작이 역작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모아진 자료를 이론적 토대 위에서 치밀하게 재구성하고, 그것을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때 역작이 탄생한다. 역작의 기준이 이와 같다면 '발발과 기원'은 틀림없는 역작이라고 감히 추천한다. 저자는 '남북관계' '동아시아' '세계정세'의 세 가지 층위에서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을 추적하며, '대쌍관계동학'이라는 이론적 틀을 통해 자신이 구성한 역사를 독자앞에 펼쳐놓았다.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이냐, 남한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남침유도'이냐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남침'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김일성-박헌영의 치밀한 계획과 스탈린, 모택동의 동의 아래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라는 견해. 책 말미에는 '남침유도'라고 주장한 커밍스에 대한 반박도 실려있다.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니?'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누구나 이처럼 자신있게 말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해보려는 이성적 노력은 소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실증하는 자료없이 반세기 동안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메아리에만 의존해오던 많은 사람들에게 엄한 계고를 동시에 하고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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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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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그런 소설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광장>을 읽었을 때는 그랬다. 초겨울의 냉기가 한반도 주변을 돌고 도는 11월의 느닷없는 오후에 나는 <광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읽기를 통해 르누아르식 회화의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가파른 비탈을 내달리는 숨가쁨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젖어서... 늦은 밤 다시 <광장>을 펴들었다. 먼동이 대륙의 어디쯤에는 터올 무렵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책을 뒤적였다.
 

민족, 이데올로기, 60년대와 해방 직후 한반도의 현실 그것의 전체성과 인과성을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광장>이 가치있다고 혹자는 평한다. 맞는 말이다. 뻔한 사랑이야기로만 점철되었더라면 <광장>이 지금처럼 신화화되었을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전체성 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 이든 "거대서사"든 어느쪽에 밀착해서 읽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아래는 낙동강 전선의 작은 굴에서 죽어가는 은혜를 지켜보고 있는 명준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눈을 뜨고 은혜를 들여다본다. 그녀도 눈을 뜨고 남자의 눈길을 맞는다. 서로, 부모미생전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이라는 걸 분명히 몸으로 안다. 자기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중략)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 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여진,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p.163)
 
최인훈은 <광장>을 6번에 걸쳐서 개작했다고 한다. 김현은 이를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작가가 이명준의 연대기적 오류를 바로잡은 것과 문장 다듬기에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문장을 세심하게 다듬은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내놓은 자식같은 글이 있고, 돌아서기만 하면 눈에 밟히는 글이 있다. <광장>은 최인훈에게 후자에 가까웠었던 것 같다. 매 구절마다 한땀 한땀 바느질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작품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저릿한 감동을 주는 이유에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런 애정도 한몫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문장을 다듬는 수고로움만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구차하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야밤에 이책을 두 번 읽게 만든 작가가 고맙고도 원망스럽다. 걸작을 읽은 후, 짧게나마 생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조바심에 발자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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