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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달여만에 들어와보는 블로그다. 10월 말 경에 랩탑을 교체했으니까, 새 컴퓨터로 글을 쓰는건 처음인 셈이다. 일기는 되도록 날마다 쓰면 좋다는 생각이 들지만, 쓸 만한 장소가 문제다. 싸이월드 다이어리는 너무 많은 주변 사람들이 읽을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그냥 일기장에 손글씨로 쓰기는 너무 번거롭다. 일기를 쓰는 것이 번거로워서는 일처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도 못 보게 워드프로세서 같은 데 쓰기는 정리도 안되고 성의가 없는 것 같다.

여기 쓰는 편이 가장 적당해 보인다. 오다가다 사람들이 읽어도 큰 부담 없고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p.s : 트위터(twitter)에서 의외로 촌철살인의 글도 가끔 읽게 되는데 일상의 활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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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전날 폴라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주의인가>를 읽느라 새벽 늦게 잠 들었다. 오전 10시 경 늦은 아침을 먹고, 폴라니의 또 다른 책 <거대한 전환>과 바바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을 읽었다. 두 책 모두 다 읽지는 못했다. 역시 이론서인 <거대한 전환>에 비해 장면의 묘사가 실감나는 <8월의 포성>이 더 술술 읽히는 느낌이다.

동아리에서 폴라니 세미나를 3시간여에 걸쳐서 했다. 사실 폴라니를 읽은 이유도 이 세미나 덕분이다. 나는 발제자도 대표답변자도 아니었지만, 나름 능동적으로 세미나에 참가했다고 생각한다. 폴라니의 “자유방임은 국가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라는 주장은 신선했고 설득력도 있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나의 발언에 대한 한 참가자의 코멘트가 있었다. “정리를 참 잘하시네요”란다. 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말이다. 언뜻 듣기에 칭찬이다. 발화자의 의도 역시 그러했으리라 짐작해보지만, 마음이 개운치만은 않다. 정리를 잘 한다는 칭찬은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뜻인 동시에 나의 주장이 그 남의 말 속에 함몰된다는 징후인 까닭이다.

어릴 적부터 말실수가 적다는 이야기를 나는 종종 듣곤 했다. 내가 말을 할 때 그만큼 조심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조심하는 습관은 실수를 줄이게 마련이다. 나는 내 글에서도 종종 이와 비슷한 습관을 목도한다. 논리적인 글에 비해 감정을 표현하는 글에 있어서 내가 대단히 서툴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개인적 신화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글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글이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언제부턴가 말과 글의 진정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진정성이 사라진 말과 글은 주목받지 못한다. 아무리 서툰 사람이라도 대상의 진정성은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굶주린 아이의 눈빛처럼 진정성은 상황에 따라 의사소통의 도구인 말조차 불필요하게 만들 때도 있다. 인간은 타인의 진정성에 대해 똑같은 그것으로 화답한다. 그것이 축복이건 저주건 그 내용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진정이냐 아니냐하는 것이 문제다. 진정어린 축복에는 진솔한 감사로, 처절한 저주에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대응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말과 글은 인간의 내적 감정에 대한 진솔함을 갖추고 있을 때 그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오로지 진정성 아래서만 주목받는다. 진정성이 사라진 말과 글은 관례적 의미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이러한 말들은 피상적이고 사무적인 차원에서의 의미는 가질지언정 진실로 인간들로부터 주목받을 수는 없다. 아울러 감동을 자아낼 수도 없다. 어떤 예술작품을 접하고 그것으로부터 별 감흥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만들어진 백마디는 진정으로 감동받은 사람의 소박한 한 마디보다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러한 관례적 소통이 갖는 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발화자 스스로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차단을 의미한다. 늘상 자신을 감추고 몸을 사리는 덕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식적 노력을 통해 차단을 하던 초기와는 달리 그것이 습관화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말과 글에 진정성을 담는 것을 엄청난 모험처럼 여기게 되는 까닭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일상에서까지 굳이 모험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직장 혹은 학교에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시달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진정성에 대한 모험의 의지는 점차 잊혀져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지가 있기는 있었나?’라고 반문하기 시작하고 완벽하게 망각하거나 혹은 무시한다.

인간의 내적충동 혹은 열정은 ‘소통하고자 하는 의욕의 부재’탓에 그 활기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나의 내면에 존재했던 의지는 ‘말할 수 없음’으로 인해 식어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 위,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만이 주어진 현실에서 감정과 열정은 끊임없이 식어만 간다. 바야흐로 인간성의 위기다. 그것은 바로 ‘나’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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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5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카고 학파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적 목소리들이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케인즈주의로의 회귀,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숙고 등이 한 방편으로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것도 자유주의의 전면적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힘겨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이론적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는 현 상황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칼 폴라니(Karl Polanyi;1886~1964)’다.

가장 널리 알려진 폴라니의 저작은 <거대한 전환>이다. 그의 초인적인 박학다식의 영향을 받아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거대한 전환>을 일반이 쉽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는 그러한 어려움을 다소나마 완화하기 위한 폴라니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이 짧은 문고판 책에도 폴라니가 가지고 있었던 시장과 노동, 그리고 사회와 경제에 대한 생각이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 있다. 케인즈는 폴라니에 비하면 대단히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며, 경제생활이 인간의 삶을 특정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폴라니는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시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제가 다른 사회영역보다 주도적 위치에서 인간 삶을 규정하게 된 것이 노동과 토지, 화폐의 상품화 때문이라고 봤다. 노동과 토지, 화폐는 본래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폴라니는 이들을 ‘상품허구’라고 말한다.

‘상품허구’가 탄생하기 이전, 즉 전면적인 시장경제체제 이전의 사회에서, 폴라니는 경제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 배태된(embedded)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인간은 경제적 존재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 있듯, 사회적 존재라고 여겼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 배태되어 있던 경제가 전면적 시장경제체제에 이르러 사회적 관계를 압도했고,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명제가 종교적 진리처럼 떠받들어지게 됐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경제체제는 사회 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경제는 본래 사회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개입으로 전국적 규모의 시장이 확고부동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고 보았다. 노동이 상품화 되면서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굶주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시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존재했으며 변모해 왔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주장을 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하에서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 수록된 역자의 폴라니의 삶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이제스트 역시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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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극은 사회주의 혁명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테러리스트 들이 알렉세이 대공을 암살하려는 과정을 그렸다. 보리스 아넨코프, 스테판 페도로프, 이반 칼리아예프, 도라 불보프, 알렉세이 부아노프, 대공비, 스쿠라토프 등이 등장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칼리아예프와 스테판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 인식에 대한 간극이다.

칼리아예프와 스테판의 갈등은 현대인이 전쟁과 혁명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역설에 놓여있다. 살인을 용인하는 것, 미래의 가능적 인간을 위하여 현재의 구체적 인간을 희생한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이는 알렉세이 대공과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폭탄을 던져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구체화된다. 수천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공의 어린 조카 한 둘 쯤의 죽음은 용인될 수 있는가.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달성한 혁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수단의 불의를 용납한다는 것은 혁명의 정신적 실패를 그 원칙으로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단의 순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또한 그 역사적 성공을 그 원칙에서부터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피에르 앙리 시몽)

역사적 성공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수단의 비순수성을 개인이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순수의 온전한 극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할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내가 죽음을 통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할 때, 비로소, 타인의 죽음에 대항해서 나의 '순수성'을 논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이 근거 역시 아주 희미한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칼리아예프는 “이념을 위하여 죽는 것은 이념과 같은 눈높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행위에 대한 정당화의 방식”이라고 한다.

칼리아예프의 이 논리를 따라가면, 역사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개인에게 죽음이 곧 최선이다. 도라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 죽음이라면 우리가 택한 길은 옳지 못해. 옳은 길은 생명으로, 태양으로 인도하는 길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칼리아예프가 말한 '이념의 눈높이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되물음이다.

인간적 정의와 행복 사이의 갈등. 찢어진 의식의 심장부에서 스테판과 칼리아예프, 도라는 서로의 주변을 부지런히 맴돌고, 서로 부딪힌다.

한편, 칼리아예프와 도라 사이의 깊은 사랑을 아주 조금밖에 감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책의 해설 부분에 있었다. 작품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카뮈가 주제를 너무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글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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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 일기 4

                                         황동규



    러시 아워에 비좁은 지하철을 타고
    오랜 만에 발도 한번 밟히고
    돌아와 저녁을 짓는다
    창 밖에 어둠이 밀려와 쌓인다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너무 비좁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기억과 기억, 추억,
    저 시효가 영 지나가지 않는 부끄러운 일들,
    조금씩 밀어 자리를 만들고
    또 몇 개의 이름과 연대와 사건을 쌓아놓는다

    잠깐 존다 벌써 늦은 밤이다
    일기예보를 보려고 텔레비를 튼다
    AIDS 걸린 흑인 고아 소녀애를 양녀로 맞아
    입맞추며 좋아하는 삼십대 백인 여자가 나타난다
    갑자기 한쪽으로 확 쏠리는 정신,
    세상은 비좁아도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 이십대는 불안한 계절이다. ‘불안한 계절은 사회탓이오’라고 남의 탓을 하다가, 곧 ‘내 탓’임을 깨닫는다. ‘러시 아워에 비좁은 지하철을 타고 가끔 발 밟힐’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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