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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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사회주의 혁명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테러리스트 들이 알렉세이 대공을 암살하려는 과정을 그렸다. 보리스 아넨코프, 스테판 페도로프, 이반 칼리아예프, 도라 불보프, 알렉세이 부아노프, 대공비, 스쿠라토프 등이 등장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칼리아예프와 스테판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 인식에 대한 간극이다.

칼리아예프와 스테판의 갈등은 현대인이 전쟁과 혁명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역설에 놓여있다. 살인을 용인하는 것, 미래의 가능적 인간을 위하여 현재의 구체적 인간을 희생한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이는 알렉세이 대공과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폭탄을 던져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구체화된다. 수천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공의 어린 조카 한 둘 쯤의 죽음은 용인될 수 있는가.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달성한 혁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수단의 불의를 용납한다는 것은 혁명의 정신적 실패를 그 원칙으로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단의 순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또한 그 역사적 성공을 그 원칙에서부터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피에르 앙리 시몽)

역사적 성공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수단의 비순수성을 개인이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순수의 온전한 극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할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내가 죽음을 통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할 때, 비로소, 타인의 죽음에 대항해서 나의 '순수성'을 논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이 근거 역시 아주 희미한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칼리아예프는 “이념을 위하여 죽는 것은 이념과 같은 눈높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행위에 대한 정당화의 방식”이라고 한다.

칼리아예프의 이 논리를 따라가면, 역사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개인에게 죽음이 곧 최선이다. 도라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 죽음이라면 우리가 택한 길은 옳지 못해. 옳은 길은 생명으로, 태양으로 인도하는 길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칼리아예프가 말한 '이념의 눈높이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되물음이다.

인간적 정의와 행복 사이의 갈등. 찢어진 의식의 심장부에서 스테판과 칼리아예프, 도라는 서로의 주변을 부지런히 맴돌고, 서로 부딪힌다.

한편, 칼리아예프와 도라 사이의 깊은 사랑을 아주 조금밖에 감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책의 해설 부분에 있었다. 작품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카뮈가 주제를 너무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글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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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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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그런 소설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광장>을 읽었을 때는 그랬다. 초겨울의 냉기가 한반도 주변을 돌고 도는 11월의 느닷없는 오후에 나는 <광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읽기를 통해 르누아르식 회화의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가파른 비탈을 내달리는 숨가쁨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젖어서... 늦은 밤 다시 <광장>을 펴들었다. 먼동이 대륙의 어디쯤에는 터올 무렵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책을 뒤적였다.
 

민족, 이데올로기, 60년대와 해방 직후 한반도의 현실 그것의 전체성과 인과성을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광장>이 가치있다고 혹자는 평한다. 맞는 말이다. 뻔한 사랑이야기로만 점철되었더라면 <광장>이 지금처럼 신화화되었을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전체성 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 이든 "거대서사"든 어느쪽에 밀착해서 읽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아래는 낙동강 전선의 작은 굴에서 죽어가는 은혜를 지켜보고 있는 명준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눈을 뜨고 은혜를 들여다본다. 그녀도 눈을 뜨고 남자의 눈길을 맞는다. 서로, 부모미생전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이라는 걸 분명히 몸으로 안다. 자기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중략)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 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여진,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p.163)
 
최인훈은 <광장>을 6번에 걸쳐서 개작했다고 한다. 김현은 이를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작가가 이명준의 연대기적 오류를 바로잡은 것과 문장 다듬기에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문장을 세심하게 다듬은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내놓은 자식같은 글이 있고, 돌아서기만 하면 눈에 밟히는 글이 있다. <광장>은 최인훈에게 후자에 가까웠었던 것 같다. 매 구절마다 한땀 한땀 바느질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작품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저릿한 감동을 주는 이유에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런 애정도 한몫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문장을 다듬는 수고로움만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구차하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야밤에 이책을 두 번 읽게 만든 작가가 고맙고도 원망스럽다. 걸작을 읽은 후, 짧게나마 생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조바심에 발자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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