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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0월말부터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한 '토지' 1부를 어젯밤에 다 읽었다. 모두 네권이며, 쪽수로는 1600쪽 정도 된다. 읽는데는 두 주일이 걸렸다. 1주에 두권 정도 읽은 셈이다. 학기중에 대하소설을 읽으려니까 다른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힘들었다. 나머지분량은 겨울방학중에 읽으려고 벼르고 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통영태생이다. 1926년10월 28일(음력)에 태어나서 2008년 5월5일에 돌아가셨다. 우리 나이로 83세이다. 박경리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5년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감옥에서 죽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통에 세살짜리 아들이 죽는다. 작가의 유일한 혈육은 살아남은 딸 김영주다. 딸은 후일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한다. 작가는 1955년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토지'를 처음 쓸 무렵인 1969년에 이미 작가는 장편소설 8권과 단편소설집 1권을 써낸 중견작가였다. 사십대 초반의 작가는 어릴적 외할머니에게서 전해들은 거제도의 이야기를 줄기로 하여 '토지'라는 장편소설을 구상한다. 처음에 '토지'는 1부로 완간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무대는 점점 더 넓어지고, 시간도 길어져서 '토지'는 5부까지 이어진 대하소설이 되었다. 작가는 무려 24년 동안을 '토지'를 쓰기 위해서 고투했다. '토지'를 완간한 뒤의 박경리는 69세가 되었다. 박경리는 그야말로 자신의 혼을 쏟아서 이토록 장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 방대한 소설은 무려 20권 규모의 소설이 되어서 '소설로 읽는 한국근대사'라는 명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시간적으로는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1945년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50여년 세월이 들어있고, 소설의 무대는 한반도에서 간도, 일본을 아우르고 있다.
1부의 배경이 되는 역사는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을미사변, 을사늑약, 러일전쟁, 군대해산 등을 포함한다. 조선이라는 오래된 사회는 서양에서 밀려온 거대한 물결에 쓰나미를 맞은 것처럼 흔들린다. 외세의 침략이 있기 전부터 조선은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서양과 신흥강국 일본의 침략은 그 혼란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소설에서는 그런 역사들이 직접 나오기보다는 최치수나 김훈장, 이동진, 조준구 등의 양반과 목수 윤보 등의 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시대의 변화에 대하여 적극 대응한 것은 평민의 종교인 동학이다. 이에 비한다면 양반은 마지못해 그 흐름에 끌려들어가면서 끝끝내 바뀌어버린 현실을 보기를 거부한다. 양반들은 단발령이나 을미사변을 거쳐서 을사늑약에 이르러서야 전면적인 대일항쟁에 나서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런 역사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간간히 등장하는데, 최근에 같이 읽었던 강준만의 <한국근대사산책>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박경리가 이 시대의 역사를 세세한 부분까지 꿰뚫어보는 지식을 가지고 소설을 썼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지리산과 섬진강이라는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택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마을의 농민들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전개된다. 최참판댁은 만석꾼이라고 한다. 만섬지기 농사를 짓는 대지주다. 한섬은 열말이다. 요즘 도량형으로 하면 180리터 정도 된다고 한다. 크게 잡아서 논한마지기에 다섯가마가 나온다고 쳐도 최참판댁의 논은 2,000마지기 정도 된다. 대단한 규모다. 자작농이 가지고 있는 논이라야 겨우 3-4마지기인 것을 감안하면 최참판댁은 오늘날로 치자면 대기업의 소유주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최참판댁이라는 대지주의 토지를 빌려서 농사를 짓고 삶을 영위한다. 농민들에게 최참판댁은 사실상 파라오나 다름이 없는 존재다.
1부는 사실상 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윤씨부인과 최치수, 서희라는 최참판댁의 당주들이 최고의 위치에서 중심을 잡기는 하지만,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폭이 넓다. 모든 인물들은 쉽게 풀어낼 수 없는 무섭게 꼬여버린 문제들을 붙들고 고뇌하는 존재들이다. 이 고뇌는 파괴적이다. 인물들은 살해당하거나 죽거나, 미치거나, 좌절하거나, 이상하게 변해버리거나, 적당히 도망가거나, 끝까지 투쟁하거나 하면서 이야기에 참여한다. 용이와 월선이, 칠성댁, 임이네의 관계는 이야기의 중요한 축이다. 용이는 평민의 삶을 보여준다. 최치수와 서희, 윤씨부인, 조준구, 이동진은 양반의 삶을 보여준다. 문의원, 목수 윤보, 강포수, 김훈장 등은 잔반이나 중인같은 중간지대의 인물들이다. 이외에는 평산, 귀녀, 칠성이 같은 범죄인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도 만만찮다. 종의 신분인 삼수, 수동이, 삼월이, 김서방, 김서방댁은 최참판댁의 중심인물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들이다. 구천이와 별당아씨, 김개주와 우관스님은 국지적인 존재로서 사건의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조준구와 홍씨, 그리고 일본은 악의 세력이다. 조준구와 홍씨는 양반으로서 염치도 없고 신념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치부와 권력만이 최고인 존재이다.
이야기의 흐름의 중심에는 최치수의 죽음과 윤씨부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긴 힘의공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힘의 공백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외부세력의 개입을 불러온다. 이건 마치 조선왕조가 무너져내리는 당대의 상황과 비슷하다. 최치수는 원한에 맺힌 종 귀녀와 몰락양반인 평산의 음모때문에 희생된다. 그 힘의 공백을 메꾼 것은 윤씨부인이다. 윤씨부인은 시종일관 이성적이다. 그러나 윤씨부인조차도 호열자(콜레라)의 재앙은 이겨내지 못한다. 윤씨부인의 죽음과 마름인 김서방, 봉순네의 죽음은 윤씨부인을 축으로 한 권력이 붕괴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서희와 길상, 봉순의 연합은 너무나 미약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이다. 여기에 외부세력인 조준구와 홍씨의 무지막지한 침탈이 이어진다. 먼 친척이라는 인연을 이용하여 조준구는 최참판댁의 심장까지 치고들어와서 그 많은 재산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종들과 소작인들을 분열시켜 자기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한다. 마침내 나라마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넘어가고, 조준구는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농민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가혹한 착취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목수 윤보의 지도자로 삼아서 조준구를 죽이려고 한다. 목수 윤보는 얽매인 게 없는 자유인이다. 처자도 없고, 재물에도 매이지 않는다. 아는 것은 많고, 당대의 사건과 반란의 기술에도 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악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조준구는 살아남고, 반란을 꾀한 사람들은 가혹한 응징을 당한다. 1부는 서희와 용이, 김훈장 등이 간도로 탈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간도는 일종의 해방구인 셈이다.
모든 재미난 이야기는 사랑과 질투, 배신, 갈등과 투쟁을 구도로 해서 벌어지는 법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사랑과 갈등의 이야기다. 1부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구천과 별당아씨의 사랑, 용이와 월선의 사랑, 귀녀와 강포수의 처연한 사랑, 이제 갓 스물이 된 길상과 봉순의 사랑, 윤씨부인과 김개주의 사랑, 삼월이를 사이에 둔 조준구와 삼수의 난행 등 갖가지 모양의 남녀관계가 나온다. 이 가운데 단연 사랑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정말 초월적이다. 모든 난관을 뛰어넘는 질긴 사랑이다. 정말 그들은 상대를 자기 몸의 한부분인것처럼 아끼고 그리워한다. 둘 다 너무나 심성이 착하다.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강청댁과 임이네는 사실은 불쌍한 여인들이다. 강청댁은 볼품없고 아기도 못 낳는 여인인데다가 질투의 화신이다. 이에 비해서 임이네는 예쁘고, 아기도 잘 낳으며, 잡초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여인이다. 강청댁의 질투는 강하지만 일찍 죽는다. 이에 비해서 임이네는 끝끝내 살아남아서 용이와 월선이 사이를 훼방놓는다. 임이네는 살인자의 아내가 되어도 살고, 거지가 되어도 살며,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는다. 끝이 어떨지 궁금해지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를 읽고 난 뒤에 전염병이 나오는 장면만 나오면 예사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 책에도 전염병은 어떤 등장인물 못지 않은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 윤씨부인을 순식간에 죽게 만드는 것은 호열자라고 불리우던 콜레라다. 마름인 김서방이 하루만에 죽음에 이른 뒤에 최참판댁과 동네는 마치 해일에 휩쓸린 것처럼 쑥대밭이 되고 만다. 윤씨부인, 김서방, 봉순네, 강청댁, 문의원, 김진사댁 청상과부 두명,김훈장의 자식들이 순식간에 소설에서 사라진다. 1부의 4편 제목이 '역병과 흉년'인데, 이 둘은 사실상 당대의 인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의 쌍두마차와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역병은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존재였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콜레라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조준구다. 조준구는 일본인들을 사귄 덕분에 콜레라가 접촉을 통해서 옮는 것을 알고 철저하게 방역을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최참판댁이 몰락해야 자신이 일어설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악인의 간지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에서 악인은 반드시 몰락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악인이 올라간 정상에서 고꾸라지는 과정의 이야기와 최참판댁의 후계자인 서희가 어떻게 다시 재기하는지가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줄기가 될 것이다. 1부는 서희와 길상이 도망가는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간도다. 이야기의 무대는 넓어지고, 이제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