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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어깨, 까만 머리의 푸른 내 청춘 앞에 앉아 있는 코흘리개들을 보며, 이들과 함께 인생을 시작했으니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살기로 다짐했었다. 그런 삶도, 그런 한평생도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일기는 내가 선생 노릇을 그만두려 하다가 다시 교단에 서며 쓴 글들이다. 나는 감동 없는 일상을 못 견뎌한다. 어린이들에게 나는 늘 새로워야 했고, 어린이들 앞에 서서 나는 늘 살아 있는 생명 자체로 싱그러워야 했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 그 땅을 달리는 아이들의 튼튼한 발길들을 나는 오늘도 바라본다.
-머리말 중에서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교단에 서서
절망의 현실을 딛고 새롭게 틔운 희망의 기록!
‘김용택’이라는 주어는 ‘시인이다’라는 보어로 맞춤한다. 그의 서정은 섬진강을 노래하였고 자연을 온몸으로 껴안아 문명의 가차없는 파괴로 사라지는 농촌을 아파했다. 당대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아프게 짚어내는 그의 시는 ‘김수영문학상’을 통해, 자연을 보듬어 서정미가 가득한 시어들로 우리말의 풍요로움을 살찌운 시들은 ‘소월시문학상’을 통해 상찬되었다.
또한 ‘김용택’이란 주어는 ‘선생이다’라는 보어 앞에서도 빠지는 아귀 없이 맞춤하다. 스물두 살의 청년 김용택은 시골 분교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받은 후 30여 년간 일별(一瞥)의 외도 없이 선생으로 살아왔다. “싱싱한 어깨, 까만 머리의 푸른 청춘에 코흘리개 아이들과 만나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살기로 다짐”한 그의 교사로서의 삶은 “미안할 정도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마냥 행복한 교사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아이를 아이답지 못하게, 선생을 선생답지 못하게 하는 교육현실에 그는 교사로서의 자신을 회의했다, “선생 노릇”을 그만두려 했다.
그렇게 맞이한 서른여섯 번째 교단. 절망의 늪에서 그를 끌어 올린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진메마을, 그곳에 자리잡은 덕치초등학교에서 김용택은 전쟁으로 교실도 없이 운동장 벚나무에 칠판을 매달고 수업을 받았고 배고프면 살구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수십 년이 지나 살구꽃 피는 봄날, 다시 돌아온 덕치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 다은이, 현수, 예영이, 하영이, 종현이, 희창이, 강수, 용민이 은희, 한빈이……. 터진 쌀자루 마냥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부산한 몸짓과 갖은 말썽들에 쉼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 삶을 아름답다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들을 차근차근 기록하기 시작하며 다시 교사로서 김용택은 오롯할 수 있었고 그 기록이 묶여 <김용택의 교단일기>라는 질박하고 따사한 책을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이 책은 시인 김용택이 천상 교사임을 보여준다. 아이를 아이답지 못하게, 교사를 교사답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현실 속에서 교직에 회의하던 교사 김용택이 자신의 모교, 덕치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만나면서 새롭게 교단에 서며 일기를 쓴다. 여름방학 동안 구구단을 까맣게 잊어버린 아이들에게 알밤을 먹이며 시작된 2학기. 터진 쌀자루 마냥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부산한 몸짓과 쉼없는 말썽들……. 바로 앉아라, 연필을 왜 그렇게 쥐냐, 이응을 왼쪽으로 돌려야지 왜 오른쪽이냐를 가르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매일의 삶을 아름답다고 긍정한다. 돌부리 하나 예사롭게 지나치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과 세상의 어긋난 것들을 허투루 넘어가지 못하는 교사의 마음, 그것이 김용택이고 그 마음의 결이 일기 안에 따사로이 배어 있다. 그래서 그는 천상 시인이고 천상 교사이다.
때론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문다. 너를 이기려는 게 아니다. 내가 바로 서려는 거다. 내가 바르게 살려는 거다. 이건 사랑이다. 놀라운 사랑의 깨달음이다. 사랑의 획득이다. 산이 넘어지며 밀어도 끄떡없고, 꿈쩍 않는 막강한 사랑이다. 사랑을 넘어선 높은 도덕의 힘이다.
때론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문다. 너를 이기려는 게 아니다. 사랑의 자세를 바로 세우려는 거다. 만인을 위한 사랑, 진실과 진리를 지키려 끝없이 싸우는 사랑, 세월이 가도 죽지 않는 사랑, 타협 없는 사랑만이 세상을 사람들 세상으로 바꾼다.
-11월 18일 일기 중
새싹같이 맑은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쓴 행복일기!
섬진강 시인을 다시 교단에 세운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 일기는 2004년 8월 23일 2학기가 개학하며 시작된다. 방학 내내 아이들이 그리워 괜히 학교 에 나가 교실 뒤편에 걸린 아이들 그림을 보며 미소 짓다가 다시 아이들이 생각나 한 사람씩 전화 걸어 안부를 물어보던 천상 교사인 김용택. 개학하여 선생 보니 좋다고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보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이 아이들을 소중히, 훌륭하게 키워내야겠다, 제대로 선생 노릇 해야겠다, 새삼 다짐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 만만치 않다. 숙제 검사를 하니 하루도 일기를 쓰지 않은 애들이 있지 않나, 모두들 방학 전에 달달 외웠던 구구단을 다 까먹어버렸다. 화를 꾹 누르고 교과서를 나눠주니 다음날 잃어버렸다며 천연덕스레 이야기하는 아이들. 이 천방지축 아이들이 연신 일으키는 온갖 말썽과 사고들 앞에서 꿀밤 한 대 쥐어박고도 열이 식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그를 울리고 웃기며 교사로 살아가게 만든다.
혼내 놓고 그게 마음이 시려 밤새 끙끙 고민하다가 다음날 교실에 들어서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는 양 “선생님~”하며 달려와 안기는 아이.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마지막 말을 “내 죽음을 ‘말’리지 마라” 바꿔 놓고도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는 아이. 선생님을 “용택이, 용택이”라고 부르는 동네 오빠에게 화가 나 “난 우리 선생님 별명을 부르는 사람은 용서 안 하고 내가 선생님 대신 반은 죽여놓을 것이다”라고 일기에 쓰는 아이. 옆에 딱 붙어 서서는 졸졸 따라다니다가 어느샌가 허리춤을 꼬옥 껴안으며 “아빠”라고 부르고는 머쓱한 웃음 짓는 아이…….
이 아이들이 일으키는 명랑유쾌한 사고들에 키득거리다 어느 순간 짠한 감동이 다가오며 덕치초등학교로 가서 이 아이들과 만나고 싶어진다.
눈이 온다. 천천히, 가만가만, 조심조심, 조용조용히 온다. 함박눈이다. 나뭇가지에 얹히고 까만 나뭇가지 사이로 내린다. 아름답다. 곱다. 행복하다. 생이, 사는 일이, 즐겁다. 내 마음에 사랑의 물결이 인다. 평화다. 내 아이들과 내 아내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작은 아이들에게 내 사랑이 눈송이처럼 가 닿기를, 오! 눈을 봐라.
-3월 5일 일기 중
감동을 희구한 치열한 삶의 기록, 가멸찬 내면의 살뜰한 풍경!
섬진강을 바라보며 아내와 자식과 아이들에게 보내는 감동의 연서(戀書)!
그의 책상 앞에는 로댕의 다음과 말이 붙어 있다. “인생은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그는 감동 없이 사는 삶을 못 견뎌한다. 그래서 그는 선생이다. 선생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운다. 말과 글로 자신을 포장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은 그를 어느 한 자리에 머물거나 고정되지 않도록 늘 자극했다. 아이들은 그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고, 그의 일상을 교육시켰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되기 위한 매일의 채찍질이 바로 이 일기다.
일기란 자기반성과 쇄신의 기록인 동시에 하루 동안 떠도는 자기 생각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일기 안에는 시인 김용택의 서정이 담뿍 담겨 있다. “안개 속에 찾아온 햇살로 빛나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가을을 느끼고 “한겨울 새벽 달빛에 젖어” 자연과 화해한다. 그래서 그는 섬진강을 떠날 수 없다. 그의 서정을 쉼없이 자극하는 자연 속에서만 김용택은 오롯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손을 잡고 한없이 그를 믿어주는 아내가 있다. “아내에게 느끼는 이 한없는 사랑이 아이들과 세상으로 아름답게 번져나가고 스며든다.” 일기 속에서 다문다문 표출되는 아내에 대한 살뜰한 마음이 그리 정겹고 따사하다.
지은이_ 김용택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2년 창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6년 <맑은 날>로 제6회 김수영문학상을,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현재 자신의 모교 덕치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리운 꽃편지>, <강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그래도 당신> 등이 있고, 산문집 <작은 마을>,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섬진강 이야기>,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등이 있다. 이 밖의 작품으로 장편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내 똥 내 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