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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독서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북리더기를 들고 나온 김에 다운로드 해둔 책들 중 하나를 읽기로 결심했다. 무얼 읽을까 고심하던 내 눈에 들어온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언젠간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하여 구매했는데, 정작 책도 안 읽고 모임날에도 안 나갔던 기억이 있어 표지만 봐도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래, 지금 읽어보자.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이북을 열었다.
제목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 책은 여행 에세이였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시선으로부터,'만 읽어보고,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보다가 잠들어버렸다. 지금 확인해보니 '시선으로부터,'에 별점 5점을 주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의 나에게 큰 감동이 남아있질 않다. 그래서인가 이 책도 조금의 편견을 가지고 읽었다. 특히 나는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깐깐한 기준을 가지고 보겠다는 이상한 고집을 장착한 채 이 에세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왠걸,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잠깐 보려고 했던 것이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는 순간까지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글이 어찌나 술술 읽히던지 눈 깜짝할 새에 정세랑의 글에 빠졌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가의 웃음 포인트에선 나도 같이 웃었다. 책의 첫 문단에서 ''작가의 말'이 재밌다는 말을 들어서 에세이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니'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평을 들었을지 추측이 되는 글이었다.
단순히 재미만 있었더라면 단숨에 빠져들 수 없었을 것이다. 몇몇 소챕터의 마지막 단락을 죽죽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작가의 사유를 여행과 연결지어 물 흐르듯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를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9.11 메모리얼파크를 이야기하며, 현재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는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 더 거슬러 올라가선 삼풍백화점,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등... 우리는 과연 죽은 자를 모욕하지 않고 있는가 생각하며 숙연해졌다. 분명 나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도, 과거의 정세랑과 현재의 내가 연결되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계속해서 언급된다. 여성의 안전을 걱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은 망가진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예술과 자본의 균형을 고민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여행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다채로운 풍경이 된다. 하나의 주제가 일단락이 될 때마다 색다르고 멋진 풍경과 더불어 현재 사회를 고민케하는 한두 마디가 마음에 남아 좋았다.
서평 워크숍의 강사님은 '독서란 책과 나 사이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나는 앞으로 다녀올 무수한 여행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다짐했다. 물론 매 순간 눈앞의 풍경과 세상의 문제점을 연결 지을 순 없을 테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정세랑 작가의 다정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찾아보니 여행을 갈 수 없던 코로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그 시기에 읽었더라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들여다보았을 듯하다. 그러나 코로나가 완화된 후, 해외 여행을 네 번이나 (많이도 갔다) 다녀온 입장에서 지난 시간이 조금 아깝다. 오히려 이 글을 읽지 않고 가서 그저 즐기기만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후로 떠나는 여행에선 오만가지 사유를 하다가 내 곁의 사람을 놓칠까 걱정이 되지만, 그마저도 새로운 사유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