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펭씨네 가족
케빈 윌슨 지음, 오세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은지는 벌써 오래전이다.
읽는 동안도, 마악 책읽기를 마쳤을때도, 시간이 지난 지금도
도대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타임매거진, 마이애미헤럴드, 퍼블리셔스위클리 등 내노라하는 서평지에서 극찬을 했음에도 난 도무지 책에 등장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도 없고 저자가 책에 등장시킨 가족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극단적 행위예술을 지향하는 펭씨부부는 자신들의 삶에 예술을 고스란히 끌어들여 접목시키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스승이 자녀는 그들이 지향하는 예술에 걸림돌이니 아예 자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들에겐 남매가 생겼고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에 부모의 예술을 위한 퍼포먼스에 동원되는 삶을 살게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채 부모이기에 그들의 예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가운데 거부감을 갖게 되고 그 거부감은 가족으로서 가져야 하는 친밀감과 신뢰, 사랑없이 일종의 의무감으로 형성된 외형상의 가족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들의 마음이나 바램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가족에게는 오직 펭씨부부의 예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건 오로지 그들이 지향하는, '남들이 보기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예술일지라도 그들의 삶에 재현되어 삶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는 자신들만의 예술신조와 실현이 있을 뿐이다.
스승이 애초에 아이들이 걸림돌이라 했을때엔 예술에 쏟는 열정이 아이 때문에 분산될거라 염려했기 때문이지만 펭씨부부는 오히려 아이들을 그들의 예술에 참여시킴으로 가족이 동일한 예술을 지향하며 살고있다고 만족한다. 그들에게는 예술만 있을뿐 아이들의 마음은 무시된 채이다. 그런데도 부부는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부부가 말하는 ‘사랑’이란게 어떤건지 모르겠다. 내가 읽기로 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게 아니라 아이들을 자신들의 예술을 위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여겼을 뿐으로 보이는데... 사랑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진심이 담긴 사랑이라면 아이들도 이해하고 그들에게 서운해하지는 않았을텐데 아이들은 탈출하듯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가.
부모가 되었다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한채 자식에게 올인하는 이들도 어리석다.
하지만 펭씨부부처럼 두사람이 똘똘뭉쳐 자식을 도구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은 책을 읽는내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서구권과 동양권에 엄연히 존재하는 문화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부모와 자녀, 가족의 문제는 형식의 차이만 있을뿐 내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책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그러니까 부모일지라도 아이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런 강요가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로 마무리되면 그나마 이해가 되었을텐데 마지막 부분에 생뚱맞게도 애니가 영화를 찍으며 그들의 부모를 이해할수 있을것 같다는 마무리는 결국 그들의 예술행위가 옳았다는듯 동의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게 뭐야?" 했다. 가족관계조차 이기적인 관계로 진행되면 펭씨네 가족처럼 이런 가족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가?
하여튼 쉽게 정리되지 않는 책이고 내가 그랬듯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어필되기가 무난하지는 않은듯 싶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