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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윤대녕 지음, 조선희 사진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증권회사에 다니다 우연하게, 하지만 필연적으로 사막을 찾아나서는 나, 그리고 근친상간의 고민을 갖고 사막으로 떠나는 여자 화가 이영주. 무엇인가를 찾고 지키고 버리기 위해 자신만의 사막을 찾아 나선다. 미친듯한 들뜬 정사... 사막을 찾아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막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에게 있는 사막.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막.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아 소설도 자신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길을 떠남으로써 달라지는 자아. 일상 속에 매몰된 자아 정체성의 회복이 아닌 갱신. 하지만 윤대녕 소설에서 그것은 다시 본래 생활로 회귀하고 말 그런 것일 뿐인 점이 아쉽다. 그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가지만 그는 처가에 가 사과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도. 그것은 갱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풀어버리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는 회귀로 보이기도 한다.
제목에 보이는 피아노와 백합은 각각 송갑영과 이영주를 뜻하기도 하고, 사막 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유년과 삶의 향기를 뜻하는 것으로도 읽혔다. 두 사람의 삶은 나의 삶에 관여하는데, 송갑영이 내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할 때 모래 속을 걸어가던 사람과 겹쳐지며, 녹턴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청각을 통해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각성을 유도한다면, 백합은 시각과 후각을 통해 이후의 삶의 희망을 보여준다. 사막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인간의 운명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피아노 소리와 백합의 향기는 자신을 확인시켜 주는 강한 소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여운이 남는다. 그 여운은 내가 윤대녕 소설을 이해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막이 주는 여운. 그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픈 마음. 그 속에서 나를, 열정을, 삶에 대한 치열함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사진이 내용과 어울리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상업적인, 왠지 전략적인 제휴를 맺은 느낌이 든다. 잠시 불쾌. 더군다나 사진작가 조선희가 쓴 <내 마음의 사막을, 난>에서 자신이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며 인용한 이 소설의 구절은 정말이지 날 당혹하게 만들었다.
"불쑥 가까운 사람이 달라진 모습도 두렵지만 그러한 자신을 목격하는 일은 더욱 두려운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다시 말해 그러한 자신의 그러한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 그러한 자신의 그러한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구절만을 볼 때 나는 왜 가까운 사람이 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운가? 라고 한참을 생각했다. 소설 속의 원문에는 인용된 구절 앞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쩐지 달라져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인용한 구절의 의미는 남의 변화를 목격하는 건 두렵지만, 자기 자신이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더더욱 두렵다는 것이다.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조선의의 사진을 내게 더욱 멀게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