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는 봄 (반양장) 지만지 고전선집 157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무대와 객석으로 갈렸다고는 하지만 밀폐된 극장 안에서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목적으로 호흡을 하는 내내, 연극 내 상황은 현실로 흘러 들어온다. 배우가 먼저 객석과 무대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막을 허물고 관객을 끌어들이면 이제 관객이 반대로 무대를 지배한다.  

극장에서 내가 관객으로 배우들과 만나는 순간, 내 인생과 배우의 인생이 서로 또 한편의 연극을 올리는 셈이다. 극장을 가고 오는 와중에 나와 배우들이 피할 길 없이 맞으면서 감내했던 비는 우리를 동일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누군가가 조망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적어도 연극을 보는 과정은 우리가 무대 위에 있다는 의식을 또 다시 상기시킨다. 

그래서 극장은 카페의 달콤한 여유나 술집의 떠들썩한 흥분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대와 객석은 이질적인 그들과 내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공간이다. 그래서 옆 사람의 땀내와 기침과 성가신 움직임을 참으면서 두 눈과 두 귀를 확실히 열어서 머릿속에 우겨 넣어야 하는 곳이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사회부 기자가 그렇듯 ‘연극 보기’는 이성과 야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긴장의 연속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무대 위에서 낯설고 생경하며 불편한 새로운 탈주가 시작되면 우리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경험’을 실제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극장에서 나오는 나는 들어가기 전의 나와는 다르다. 다만 그 조율은 주로 나보다는 연극을 올리는 배우와 그 뒤의 감독과 태초의 극작가의 몫인 경우가 많다.  

하여 19세기말 독일 표현주의 희곡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1981년 작)은, 연극이 왜 가장 오래된 장르이면서도 가상 체험의 시대인 지금껏 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희곡 중 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과 빌헬름 2세의 통치 등 봉건적 절대주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독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청소년의 임신, 자위, 동성애 등 금기시 되었던 성(性)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낸 <눈뜨는 봄>은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려 15년 뒤인 1906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학교, 가정, 종교라는 획일적 통제 아래 학생들의 좌절과 저항을 다룬 <눈뜨는 봄>은 청소년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분출과 막 자유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민사회(봄)와 통제와 관리를 하려는 지배 계급(겨울)의 간의 갈등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작품에서 2차 성징을 겪는 호기심 많은 딸 벤들라에게 고심 끝에 “아기를 학이 물어다 준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어머니 베르크만 부인의 태도는 100년 지난 지금 보면 웃지 못 할 코미디처럼 들린다. 하지만 당시에 비해 성이 자유롭게 개방된 지금도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국가와 사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골칫거리이다.   

학 배달부 따위의 금욕적인 성교육을 받은 순진한 벤들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하는 대목은 지금 와서 보면 희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허름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벤들라나 진급 시험에서 낙제하자 부모님을 실망시킬 일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 모리츠는 쉬지 않고 반복되는 15살짜리 사건사고이다. 

결혼 제도를 통해 성을 통제하면서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역사를 돌아볼 때, 청소년의 성 문제는 단순히 나이 또래의 성적 미숙함과 욕구 불만으로 인한 성 문란으로 치부될 성격이 아니다. 사회의 기반인 결혼을 유지할 만한 능력과 자질도 갖추기 전인데다, 학교를 통해서 사회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청소년들의 성적 충동은 자칫 사회 기반을 흔드는 위험 요소라는 식이다. 그래서 사회 기준으로 볼 때, 준비할 자질이 없는 모리츠의 죽음과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아기를 가진 벤틀라의 죽음은 동일 선상으로 묶인다. 

같이 사랑을 나눴다는 이유로, 벤틀라가 집안의 명예를 위해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음에 이른 책임을 추궁당하는 멜히모어는 모리츠의 자살마저도 성교육에 관한 글 <동침>을 써줬다는 이유까지 더해 학교와 집에서 낙인이 찍힌다.  

자유정신의 표상격으로 그려지는 멜히모어는 김나지움 퇴학에다 획일적인 사고로 뜯어고치기 위해 감화시설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가 꿈꾸었던 사상(아기)은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사살(낙태)되거나, 통째(권총 자살로 날아간 모리츠의 머리)로 떨어져 버렸다. 

이후 무덤가에서 만난 유령이 된 모리츠의 유혹은 멜히모어를 자살에의 충동으로 이끈다. 이때, 멜히모어 앞에 생뚱맞지만 복면의 신사가 등장한다.  

멜히모어 : 당신은 누구예요? 누구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날 맡길 수는 없어요.
복면의 신사 : 널 나한테 맡기지 않고는 날 알 수 없어.

복면의 신사의 정체는 누구인가? 어른이라는 점에서 멜히모어는 강한 반발심을 품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가 누군지는 모른다. 누군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가 존재로써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앞으로 얼굴을 채워나가 할 미지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적어도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반사회적인 선동가 혹은 범죄자 등 획일화 사회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멜히모어가 신사를 따라 나서면서 희곡을 끝이 난다. 앞으로의 미래는 김나지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멜히모어의 과거는 전혀 쓸모가 없는 미지의 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날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인간”의 길이다.  

‘인간의 길’이라는 멜히모어의 고백은 희곡에 등장하는 기성세대를 양성하는 선생들의 이름이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홍거구르트(몽둥이), 조넨슈티히(일사병) 교장 등 비인간적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당위성’과 ‘의지’의 두 가지 상상력이 도덕, 즉 현실 체제를 만든다는 신사의 가르침을 멜히모어가 수긍한다는 점에서 어른(기존 체제)을 완전히 뒤엎는 세상을 꿈꾼다기 보다는,  변화와 개혁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는 새로운 도발을 하는 자이지 기성 질문에 해답을 찾는 자는 아니다. 다만 작가가 당시 격동의 시기에서 뭔가 변화 발전의 실마리를 보았다고 유추해 볼뿐이다.  

1918년 5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등진 프랑크 베데킨트의 꿈꾼 세상이 도래했는지 묻는다면, 이후 독일의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그가 던진 질문에서 자유로운 세상은 아닌 듯하다.  

<눈뜨는 봄>은 2009년 7월 현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한국에서 상영 중이다. 희곡이 책에서 튀어 나와 피와 살을 얻어서 무대 위에서 살아났다고 하니,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다만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토니상 8개 부문을 수상하고, 영국과 일본을 거쳐 흥행성을 보장받은 뮤지컬로 한국에 입성한 화려한 외모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그 안의 본 뼈대인 희곡을 읽었을 때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줄 지는 의문이다.  

14살 소녀 벤들라로 분한 여배우가 가슴 드러내고, 그런 이유로 공연장 내 카메라가 일체 반입 금지라는 얘기가 먼저 들린다. 백 년 전의 청소년 성 문제와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면 <눈뜨는 봄>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자칫 미국 흥행 공식에 꿰맞춰지면서 죽은 모리츠의 한숨 소리만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노파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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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원고>를 리뷰해주세요
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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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누구인가? 나를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건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꽃을 꽃이라기 부르기 전에는 꽃이 아니었듯, 타자의 시선에 드러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이다. 그래서 나만의 개별성, 주체성도 타자와의 수많은 시선 교차 속, 팽팽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심지어 지금 서평을 쓰는 이유 역시도 그렇지만) 타자에게 내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가장 근접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누구나 글을 쓸 때만큼은 ‘나’가 작가이자 최초의 독자다. 그래서 표절이나 모방은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향하는 ‘가장 악질적인 죄악’이다.

오로지 글이 존재의 이유이자 인생의 전부인 작가들의 소설, 시, 비평, 시나리오, 일기를 육필 원고인 채로, 심지어 미완성 상태로 빼앗고 태우는 행위는 단순한 소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소각로에 원고를 던질 때마다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면.

1939년 스탈린 통치 하의 러시아, 루반카 교도서의 공문서 관리인 파벨은 손과 옷에 묻은 검은 재가 흩뿌려진 핏자국이고, 나름 기름 냄새와 콜타르 냄새가 피비린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 일에서 벗어날 수도, 고통을 누구와 공유할 수도 없다. 파벨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에게 원고들이란 그저 사상의 불순물, 걸려내야 할 휴지조각일 따름이다. 

소설 <사라진 원고>의 배경인 1939년 독재자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에 이른바 ‘막걸리법’이라고 불렸던 사상의 통제가 극에 달했던 공안정국이었다. 작가들은 사상 검열 최우선 대상으로 책은 압수, 폐간되었다. 작가 자신은 감옥에 갇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족쇄가 채워졌다.

파벨이 관리하는 원고 상자에서 원고가 사라진다. 사라진 원고는 살아난 원고가 된다. 살아난 원고는 숙청의 시대를 통과하는 고통마저도 기억될 가치가 된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소각로에 몰아넣기 시작하면 잘못 호도된 방식으로 재편된 기억은 더 커다란 악몽과 불행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939년 8월, 하루 전날까지 적이었던 독일과 소련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파벨을 비롯해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 조약이 “악마들끼리 맺은 거래”라는 걸 알지만 출근길 나선 거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한산하다. 어제까지의 기억이 개인마다 설치된 자체 검열 소각로에서 폐기처분된 것이다.

정말로 이 암울한 기억들이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을까. 파벨은 좋아하는 작가 이삭 바벨의 미완성 단편 두 편을 집 지하실 벽 뒤에 숨기는 행위로 질문에 대답한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아무도 존재와 가치를 모르는 11쪽 짜리 원고는 언제 숙청될 지 모를 두려움의 근간이지만 파벨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아파트 지하실 벽 속에 숨긴 원고는 파벨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혼돈으로 몰아가는 공간이다.  

자신이 지하실에 종종 머문다는 걸 아는 관리인 나탈랴는 고발을 할지 모르는 두려움의 존재이자 동시에 성적 매력을 가진 존재로 부각한다. 이는 역으로 파벨의 수상한 행동을 용인하는 나탈랴에게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이후 섹스를 나누는 관계, 의지처가 되지만 나탈랴에 대한 파벨의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지하실은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에 의해 작동하는 파벨의 원초적인 심리 상태, 이드(id)에 대한 충실한 은유로 보인다.)

<사라진 원고>는 당시의 독재시대의 사상 검열을 고발하는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우선 읽힌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파시즘 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높은 ‘파시즘 엑스(X)’ 체제라고 진단하는 바, 책이 출간된 2009년 여름의 한국 사회 현상 이면의 묵은 악령이 소설 속에서 겹친다.

이와 더불어 파벨을 비롯해 소설 속 인물들은 오감으로 체득하는 경험, 즉 기억의 억압과 혼동에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별자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파벨과 작가 바벨의 짧은 만남은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기억을 서로에게 남긴다. 바벨은 파벨이 대접한 따끈한 차 한 잔(촉각)에 대한 보답으로 아내가 보내준 향수를 뿌린(후각) 손수건을 건넨다.   

이를 장석주의 김훈의 ‘칼의 노래’에 대한 평가를 빗대어 끌어오자면 “감각적 개별자로서 자기동일성을 수립하고 있는 한 인간이 국가공동체, 혹은 권력의 중력이 어떻게 개별자의 의지와 욕망에 삼투하며 억압하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적 내러티브”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지점과 동일 선상에 있다. 

파벨은 기차 탈선 사고로 죽은 아내 엘레나의 유해와 유품을 사건이 1년이 지난 후에야 받는다. 하지만 유골함으로 돌아온 아내는 더 이상 기억 속의 사랑스럽고 활달한 그녀가 아니다. 낯설고 생경하면서 동시에 다른 유골함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의 경험으로 남는다. 기억이 유폐되고 조작되는 독재 치하 카오스적인 1년은 엘레나에 대한 기억을 환상, 즉 구원에 가깝게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서 냉혹하다.  

뇌종양을 앓는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점점 낯설어 한다. 파벨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내와 어머니는 이제 죽음과 기억 상실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형성하는 ‘제1의 타자’ 들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런 내처짐은 파벨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자백을 했으니까요.”
“저는 그걸 물은 게 아니고,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를 당신에게 물은 겁니다.”
그 물음은 허공에 부유했다. 시모노프가 고개를 돌렸고, 파벨은 그의 얼굴에서 비통한 번민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들은 죽고 없는데. 그만 묻어둡시다.
-362쪽 

기억의 불확실성의 시대, 다시 파벨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증명될 것인가?’ 적어도 소설 속에서 숙청의 불안에 위기를 겪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직 돌아오지 아내’와 ‘돌보아야 할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돌아왔고, 어머니는 숙청을 피해 도망치는 이웃을 따라 피신을 했다.  

라들로프가 아연질색해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강의 끝났나?”-370쪽   

이제 파벨의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제 4과의 총책임자 라들로프 소령 앞에서 작가 고골의 자살에 대한 의견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소설 두 편은 이미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지만 이는 고문을 하면 간단하게 드러날 부분이다. (이 역시 죽음을 예감한 ‘칼의 노래’의 이순신 장군과 겹치는 부분이다.) 아내와 어머니에 더해 친구 세리아의 비밀 숙청, 옥에 갇힌 작가 바벨까지, 이제 파벨의 기억은 ‘나의 타자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나’라는 존재 가능성을 잃은 순간,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의 아픈 과거를 다룬 <사라진 원고>가 역사학을 전공한 미국의 젊은 작가 트래비스 홀랜드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은 좀 의아할 수도 있다. 허나 그 덕분인가, <사라진 원고>는 루반카 교도소 이후 행방이 묘연한 유대계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Emmanuilovich Babel, 1894~1940)에 대한 오마주, 즉 역사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치열한 물음과 성찰을 이끌어냈다.  

소설 밖 실제에서 사라진 원고는 그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사라진 원고’는 암울한 역사 한가운데에서도 굴복당하지 않는 개인의 부단한 성찰, 즉 작가의 애타는 마음이 전이가 되면서 다시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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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1 : 대결! 푸드 파이터! 중국편 - KBS 세상의 모든 누들 학습 만화
홍용훈 글, 임해봉 그림 / 해와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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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라면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 중국? 아니다. 1인 당 75개로 종주국인 일본을 제치고 반만년 동안 쌀을 주식을 삼은 우리나라 1위이다. 고열량에다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요인의 한가지로 꼽히고 있어 눈총을 받는다지만 여전히 그 인기는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라면이 아니어도 요즘 같은 무더위에 시원한 얼음동동 물냉면 한 그릇으로 우리의 발길과 입맛을 사로잡는 면 요리! 전 세계 음식문화의 공통분모인 국수! 분명 인류 최초로 면 요리를 먹은 누군가가 있을 터. 

KBS 명품 다큐멘터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KBS <인사이트 아시아> 세 번째 시리즈 <누들로드 Noodle Road>는 국수문화에 대한 이런 궁금증을 문명사적 접근으로 동치미 국수처럼 시원하게 풀어준 6부작 다큐멘터리이다. 이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최근 일본 NHK를 비롯해 프랑스 Arte, 이탈리아 RAI, 유럽최대의 위성 채널인 카날 플러스, 폴란드, 홍콩, 헝가리, 터키, 대만, 중국, 중동의 위성방송 알자지라 등 전 세계 유명 방송사들도 구매했다고 하니, 면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비단 우리의 생각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 뛰어난 완성도와 역사적 가치와 재미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따분해 하는 게 사실, 아이들을 억지로 TV 앞에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때 마침 다큐멘터리를 만화로 새롭게 풀어낸 <누들로드 - 대결! 푸드 파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요리 비법을 찾으러 나섰다가 소식이 끊긴 아빠를 찾기 위해 세계요리대회에 출전한 진가루는 세계 각국 대표급 요리사와 대결을 펼치면서 각국마다 확실한 식문화로 자리 잡은 면 요리를 배우고 익히면서 우승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시리즈로 출간 예정인 만화 <누들로드> 1권 중국편은 아이들이 집중하기 쉬운 줄거리에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한 학습만화답게 진가루의 요리 대결 장소에 따라 ‘국수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문명여행’, ‘위구르 자치구의 2,500년 된 국수의 비밀’ 등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잘 요약해서 실었다. 여기에 더해 요리의 기초부터 각구의 면 요리까지 ‘요리 레시피’도 같이 팁으로 알차게 소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깔끔하게 구성했고, 만화가 가진 그림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요리를 소재로 익히 널리 알려진 기존 일본 만화의 익숙한 전개가 우선 떠오른다. 전개될 만화 전체의 틀에서 볼 때, 1권에서 세계요리대회의 참여한 진가루 일행의 배경 등이 보다 충실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교육에 치중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서사 구조가 빈약한 건 아쉬운 점이다.

또 화보로 쓰는 실제 다큐멘터리 화면이 전체적으로 충실하게 보강이 될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요리대결에서 선보이는 진가루와 각국 대표 요리사의 요리만큼(다큐의 내용과 별개이지만)은 만화가 아닌 실제 사진으로 실어야 한다. 정작 만화를 보면서 드는 가장 손쉬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세계적인 호응을 생각해볼 때, 앞으로 이 만화의 효용 가치 역시 한국의 아이들에 그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좀 더 요구하자면 이후 발간할 <누들로드>에서는 간략하게 소개된 진가루의 한국 생활, 특히 한국의 면요리가 당연히!! 우선 나와야 한다.

끝으로, 진가루가 선보이는 자장면이나 탕수육 등은 “음식은 만드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먹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명제에 걸맞은 보편적인 음식으로 한국식으로 발전한 중국음식라고는 하지만 세계적인 요리사로 거듭나는 만큼 보다 한국적인 아이디어가 가미되었으면 한다. 아무래나 좋은 밀가루(다큐)로 만드는 면요리(만화)인 만큼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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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이영돈 지음 / 예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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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이리 더우니 마음의 여유라도 부릴 수 있었으면 할 때 딱 요긴하게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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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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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후광(後光)을 의미하는 아우라(aura)는 미술작품을 설명할 때 진본만이 가진 유일무이성에서 나오는 독특한 기운을 의미하기도 한다. 허나 복제와 진품의 경계가 의미 없는 사진, 영화가 아니더라도 미술작품, 특히 회화의 경우에도 문화적 ‘체험’을 통해 진품과 복제의 아우라 차이를 과연 제대로 인식하는 게 가능할까.  

“기술 복제가 미술 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했다”는 벤야민의 견해에 빗댄 얘기지만 회화의 작품성이랄까, 아우라를 논한다는 게 당최 미술사학자나 전문가들의 역사적, 논리적인 ‘계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은 막연한 ‘불신’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의 미술 감상의 수준이 중고교 시절 얇디얇은 미술 교과서의 소개와 해석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고 보면 더욱 그렇고 나 역시 딱 그 수준이다.  

이는 작품성 운운을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호당 얼마’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가치로 환산되어 투기 수단으로 전략한 현실과 문화적 아우라의 집대성이랄 수 있는 유럽의 유명 미술관이 거대한 ‘장물아비 소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루벤스의 ‘성모승천’을 미술관에 찾아가서 코앞에서 본다고 해서 ‘프란다스의 개’의 네로가 흠뻑 빠져 나올 줄 몰랐던 그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추억이나 열망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네로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성당에서 달빛을 통해서 본 성화(聖畵)가, 앞뒤로 수천 명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작품 위에 매달린 감시카메라가 내려다보고 있는 박물관에서 봤을 때와 같은 작품(?)일 거라는 생각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실제로 ‘승모승천’은 여전히 앙트워 성당에 있다. 아무튼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미술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기 외에도 만지고, 맡고, 맛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러려면 ‘호당 가격’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투기 목적과는 분명 다른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값싸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복제인 동시에 진품인 사진, 영화, 음악에 대한 애정이 높아짐에 따라 미술작품에 대한 외면이 깊어지는 현실은 당연한 수순이다. 엉뚱하게 비유를 하자면, 영화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수없이 복제되어 떼거리로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들이 주인공 네오보다 더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복제시대의 최첨단 도구인 카메라 셔터, 키보드, 마우스 등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긴 뭔가가 있다. 인간의 3대 욕구인 식욕, 성욕, 배설욕이 몸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행위이듯 도구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붓과 물감과 캔버스, 혹은 돌과 정(釘)을 가지고 만든 미술작품의 매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궁극적으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이듯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보편적인 미의 기준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무서운 그림>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보기’에 섬뜩한 작품도 소개하지만 대부분 ‘읽기’에 으스스한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제껏 평온한 일상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한 줄로만 알았던 작품의 진짜 속성인 그 무서운 아우라를 전혀 몰랐던 게 사실이다.  

이처럼 <무서운 그림>은 우리에게 작품을 보지 말고 읽으라는 주문을 한다. 미술작품의 아우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무서운 그림>이 설명하듯 그 아우라가 당시 사회적 시대상과 화가의 개인적 삶과 강렬하게 조우할 때 솟은 기운이 눈과 손끝에서 발산된다고 한다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아우라의 순도가 높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차이가 이 ‘우연한 만남’에서 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이는 작가의 사상이 갈수록 완숙해지기 마련인 후반기까지 수작을 그리는 뛰어난 화가가 드물고, 오히려 관성에 젖어 졸작을 남긴다는 현실(월간 사색의 향기 8월호 ‘비밀의 갤러리 - 죽음을 향한 시간, 예술혼을 불태우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서운 그림>은 바로 그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배려로 풀어놓은 책이다. ‘무서운’이라는 수식은 단지 그 중 무서운 부분을 취향에 맞게 고른 것일 뿐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이따금씩 일본의 사례를 비교해서 드는 등 객관적인 소개보다는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친 부분이 보이고, 소개하는 20편의 회화의 선별 기준 역시 시대적, 미술사적 기준이 아닌 저자의 개인적인 취향을 바탕하고 있으며, 옮긴이의 “저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이 뿜어내는 두려움을 다루고 있지만 그러는 중에 무게를 싣는 지점은 그림에 등장하는 …… 그녀들의 존엄이다. …… 한데 저자가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를 다룬 방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는 지적처럼 작품을 해석하는 잣대에서 일관성의 미흡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무서운 감정이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게 아닌가 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회화들이 정말 무서운가 하는 데에는 독자마다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간 같은 그림을 십 수 년을 봐오면서도 이제야 ‘이 작품에 이런 의도가 있었단 말이야?’ ‘그 영화(소설)에서 본 게(내용, 기법) 이 작품에서 기인했던 거구나’ 하고 읽는 내내 깜짝깜짝 놀랐다. 내 무식함이 들통 나서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미술 특히 회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입문서로 적극 추천할 만하다. 감성으로 먼저 맛보았으니 이제 이성으로 맛 볼 차례이다. (역시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복제불가능한 ‘The One', 네오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나는 어둠을 원했다. 커다란 어둠의 뒤편이나, 방 안 어두운 구석, 아이방에서 숨는 것에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
(중략) 자신은 몸을 숨긴 채 상대를 마음 껏 바라보는 것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사랑을 얻을 자신이 없었던 그는 훔쳐보기를 통해 상대를 손에 넣을 수 밖에 없었다.   -p 80- 르동의 키클롭스 중에서

앙투아네트는 다비드의 손에서 굴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만다. 어떻게 하면 마라를 예수로,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치켜세울까를 잘 알고 있고 그런 테크닉에도 뛰어났던 다비드다. 어떻게 하면 예전에 왕비였던 이를 능멸할 수 있었을지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아주 희미한 입술의 비뚤어짐, 아주 살짝 굽은 코, 아주 짦은 선 하나로 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악의가 지닌 무서움이다. -p161- 다비드의 마리 앙투아네트 최우의 초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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