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에 참전한 200여 명의 여성 목소리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살려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이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를 쓰고자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을 닮았다. 작가 한강은 1948년 제주에서 삼만 명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 살해의 참상을 목도했던 이들,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 등. 제주 4.3의 목소리를 반 세기가 넘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한다.
젖먹이_강요배
K 시의 학살에 관한 글을 썼던 작가 경하는 소설을 완성한 후에도 악몽에 시달린다. 세상을 등지고자 매일 유언장을 고쳐 쓰며 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가 고향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인선에게 연락을 받는다. 손가락이 절단되어 서울로 급히 이송되어 봉합수술을 받았던 인선. 경하는 그녀에게 제주집에 홀로 남아있는 앵무새를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경하는 마지막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폭설이 내린 제주에 도착한다.
P 읍에 있는 인선의 목공방에 가기 위해 눈과의 사투를 벌이는 경하. 눈 덮인 삼나무 숲을 헤매며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고 미끄러져 정신을 잃은 경하는 새를 구하러 가는 일을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새를 만졌던 감촉, 새와의 기억 그리고 어떻게든 인선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눈을 헤쳐 나간다. 죽은 새를 발견한 경하.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다시 솟아 상처에 엉긴다.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살아있던 새와 지냈던 기억과 새의 몸에 닿았던 감각만으로 작은 생명에 대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경하.
촛불을 앞에 두고 경하와 마주 앉은 인선은 엄마, 정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세 살 정심은 온 마을 사람들이 살해된 현장에서 언니와 가족을 찾기 위해 시신의얼굴에 쌓인 눈을 일일이 닦아내어 확인한다. 정심은 그날 이후, 죽은 이들이 살려달라는 악몽에 시달린다. 솜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자면서도 죽은 이들과 연결고리를 놓칠까 봐 잠을 못 드는 정심은 매일 “구해줍서” 라고 애원한다. 인선은 정심이 모았던 신문 기사, 서신을 경하의 눈앞에서 펼친다. 대구형무소에 끌려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살해되었을 오빠의 유해를 찾으려 제주에서 경산을 오갔던 정심의 마음이 담긴 흔적들이다.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 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유서를 고쳐쓰면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경하는 이제 제주 4.3의 아픔을 이어받은 인선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 간다. 한강은 잔혹하고 무거워서 외면하고 싶은 제주 4.3 역사 속 사람들을 꺼지지 않는 불꽃 앞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가슴에 쌓였던 이야기를 인선의 목소리를 통해 쏟아내게 한다.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병한 바늘이 온 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1948년에 내렸던 눈이 순환하여 오늘 내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눈은 만주 독립군의 발을 동상에 걸리게 하고, 기온이 오르면 눈은 베트남 전쟁에 살아남은 증언자의 현장에 폭우로 내리기도 한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불붙인 촛불은 제주 4.3을 거쳐, 대구 보도연맹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유해지를 밝히고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와 만주 독립군 이야기까지, 아시아 현대사로 번져 나간다.
시공간을 초월한 세 여인의 시적이고 꿈같은 대화는 제주 4.3 생존자들의 구술증언, 신문기사, 서신을 두고 말해지고 있기에 땅에 맞닿아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제주 4.3은 여전히 진상규명 중이다. 1948년 제주에는 학살을 자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턱에 구멍이 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손가락 깨물어 피를 내어 물리는 정심이 있었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광주 5.18에 관한 자료를 모으면서부터 학살과 고문이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쓰면서 극심한 편두통과 악몽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가를 살려낸 소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