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떠다니다가 간신히 구출된 그랜드 피아노. 색이 변한 피아노 앞에서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느슨해진 피아노 줄에 귀를 대고 손으로 하나하나 튕겨본다. 그리고 마치 살아 돌아온 사람을 어루만지듯 피아노의 옆면을 쓰다듬는다. “잘 버텨왔군.” 다큐 영화 <코다>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쓰나미 현장에서 구해낸 피아노와 류이치 사카모토가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카모토는 피폭 방호복을 입고 원전 사고 현장을 걷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바다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한다. 지난 30년 간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해온 그에게,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장면은 곡을 만드는 첫 번째 재료이기에. 그는 산업혁명 이후 만들어진 피아노는 늘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며, 쓰나미가 피아노를 자연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가 빠진 피아노 앞에서 쓰나미 피아노만이 낼 수 있는 음을 찾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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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가 가스 누출에 대해 광부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예술가는 직감으로 위험을 예상”한다며, 사카모토는 1990년대 초부터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반핵과 반전 시위에 참여하며 분단, 전쟁, 차별, 불합리한 사회를 담은 <캐즘>, 핵무기 반대를 노래한 <라이프 오페라> 를 작곡했다. 지난 50년 동안 일본인들은 정치, 사회적인 발언에 침묵하고 있다면서 그는 후쿠이현 원전 재가동 반대 시위대에 앞장선다.
후두암 판정을 받은 사카모토. 작곡가에게 곡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떤 음악을 쓰고 싶어 할까. 사카모토는 “앞으로 몇 년을 살지, 암이 재발해서 1년을 살지 모르겠지만 후회되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남기고 싶다."고 말하며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음악을 그려나가고 싶은지 고민한다.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를 감상하며 사카모토는 막연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 바로 타르콥스키의 영화 음악임을 알게 된다. 타르콥스키의 영상 속에는 사운드 트랙과 자연의 소리가 서로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는 “타르콥스키의 사운드 트랙 같은 앨범을 만들면 기쁠 것 같다.“라며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소리를 직접 채집하러 나선다.
물, 바람, 비, 새소리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며 손과 발로 숲에 놓인 철제를 두드려 보며 어떤 소리가 나는지 끊임없이 실험하는 류이치 사카모토는 탐험가였다. 케냐의 바다, 북극의 빙하, 숲에서 녹음된 자연의 소리는 스튜디오에서 전자음과 여러 악기와 섞여 새로운 음악으로 탄생한다.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소리”를 내내 동경해 왔던 사카모토. 그는 '영원의 음'이란 자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듯, 비 오는 날 녹음기를 들고 천장, 창문, 베란다의 빗소리를 녹음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양동이를 직접 머리에 뒤집어쓰고 비의 파동을 느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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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가 어떻게 영화음악을 완성하는지 따라가 보며 관객들은 그가 얼마나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지, 세상과 인간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원하는 음악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다가 결국 자신이 찾는 패턴이 완성되면 “이거예요. 이 소리 좋죠”하고 환한 미소를 짓는 그. 이보다 황홀한 웃음이 또 있을까.
지하 녹음실에서 컴퓨터로 곡을 샘플링하다가도, 시위에 참여하고 동일본 대지진 재해 지역 아이들과 오케스트라 활동을 바삐하다가도,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곡을 연주하는 순간, 류이치 사카모토는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수도사가 된다. “좀 더 열심히 날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해요.” 내일은 바흐 곡을 더 잘 칠 거라는 다짐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그에게, 나는 겨울 인사를 미리 건넨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사카모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