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신학 서평] 젤롯 - 현대교회가 지워버린 인간적 예수, 역사적 예수를 만나러 가다.

 

 

이 책의 저자인  레자 이슬란은 이력 자체가 특이하다. 이란에서 태어나 이란혁명때 미국으로 건너가 10대에는 기독교에 심취하다가 다시 가족의 종교인 이슬람으로 돌아가 세계종교화합을 위해 힘쓰고 있는 그의 이력은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이력때문인지 이 책은 현대 기독교의 왜곡된 시각 안에 갖혀버린 인간적 예수를 우리들에게 초대하는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예수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사건 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놓고 그 위에서 성서를 조망하는데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택하는 성서의 텍스트로만 예수를 조망하려는 태도 때문에 왜곡된(물론 기독교에서는 가장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이지만) 모습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현대의 모습에 대해-물론 중세부터 이어지고 있지만-적나라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예수보기는 레자 이슬란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 편견을 최대한 가지지 않은 채 이러한 예수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역사적 예수보기는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사례가 많았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 상황 아래 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를 고백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접근함으로서 고대 근동아시아의 기독교적 뿌리의 원형을 캐어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을 가져오게 된 이유는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유대적 기독교의 모습과 바울서신(신약성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이 보여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의 대비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살았던 시대를 조명하고 예수가 외쳤던 것은 무엇이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하려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예수가 살았던 1세기 팔레스틴 지역의 상황은 로마의 지배 속에 분봉받은 유대왕족이 철저하게 이중으로 농민을 수탈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왕족과 제사장 그룹은 로마의 신에게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은 사람으로 비쳐줬으며, 이러한 자들을 멸하는 것이 그 당시 일어난 메시야 운동의 중심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로마의 입장에서는 반역자들이었으며 이들을 사형시키는 방식이 십자가처형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반역의 죄라는 항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가 국가적 저항과 상관이 없다는 일부 신학자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복음서 곳곳에서 벌견된다. 예수의 출생지인 나사렛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으며 이러한 곳의 목수가 일용직 직공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도 다양한 시각차를 가지고 있다. 마가와 누가가 바라보는 관점(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보려고 했다는 것)과 마태와 요한이 보는 다윗의 자손을 연결시키는 관점(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 출생설을 만들었다)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당시 사회적 세력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세례 요한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별도로 보기도 한다), 젤롯(열심당원)당의 주요 세력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젤롯당은 예수 사후 30년 이후 등장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젤롯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저자는 예수운동이 이러한 젤롯성향의 한 줄기로 본다-젤롯당과 직접 연결을 문제가 된다. 

저자는 예수의 시대와 사도바울의 시대 이후 예루살렘 멸망(A.D 73년)이 지나고 복음서가 완성되어졌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말한 성전멸망의 이야기는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 복음서기자의 창작이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영향을 받았으며(제자였거나 적어도 같은 입장을 가졌다고 본다) 고대 유대교의 잘못된 구조를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예수가 성전정화사건 이후 로마군인에 의해 잡혔고, 십자가 처형이라는 반란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죽었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나라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세계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현세에 이루어질 나라이기 때문에 비밀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적에 대한 항목은 그의 신적 능력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현세는 받아들이지만 그 당시 마술적 세계관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의 항목이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측면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마술사들에게 걸었던 신의 이름을 훼손했다는 죄목이 예수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 후대의 상상적 산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에서 사라지게 된 원인은 두가지로 말한다. 첫번째 원인은 예루살렘교회의 멸망이다. 로마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멸망한 후 기존 유대공동체가 주도하던 기독교의 주도권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첫째 원인이다. 두번째 원인은 기존 유대공동체가 Q어록에 의존한 구전전승구조였지만 그 당시 지식인인 바울의 서신이 기독교 사상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초기 기독교공동체에서 바울은 이단적 입장으로 몰려 있었다. 기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야고보는 바울의 교리를 조심하라고 권했다는 것이 베드로의 서신에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기존 권위가 사라지고 이방인의 종교로서 가장 맞는 바울의 사상이 인정을 받으면서 역사적 예수를 지워버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버린다. 특히 그 당시 세계공용어인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의 서신에 녹아있는 헬라사상의 이원론적 입장이 기독교를 영육분리의 입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볼 때 초기기독교의 모습을 예수 전, 예수시대, 예루살렘 멸망과 이후 기독교사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 한국교회를 이끄는 기독교의 뿌리는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전통에서 만들어진 진정한 기독교적 전통에서 역사를 삭제하면서 신앙만 강조하는 내세적인 기독교만이 남아 있는 느낌이다. 올바른 기독교라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하며 신앙의 힘으로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오직 신앙만 강조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자본주의의 물신에 빠져버린 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세속보다 더 썩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분들이 이런 교회의 모습에 한탄을 하고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은 이미 역사감각을 상실한 교회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런 책이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라 생각된다. 이 책에 동의하건 안 하건 간에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성의 사고를 통해 지평을 넓히는 것 자체로도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각을 통해 역사의식에 눈 뜨게 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보면서 충격을 빠지는 사람이 더 많을거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기 신앙의 성장을 만들어가는데 좋은 약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자 이제 용기내어 역사적 예수를 탐미해보자. 진정한 신앙의 성장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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