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아침
한희수 지음 / 은(도서출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하던 예수,,,

유월의 아침에는 그를 볼 수 있을까?


간음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왔다. 그를 시험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결론을 내릴지를 지켜보고 있다. 예수를 옭아맬 기회를 찾기 위해...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뭐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저분한 이야기들로 시작한다. 사별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여인이 한 남자를 유혹했고 그 유혹을 통해 돈을 받았으며, 각종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에 그 여인이 다니는 신학교에서 징계를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한 여인의 부정이야기 정도로 느껴지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이 소설의 복선이었나보다. 

점차 읽어가면서 여인과 그 남자의 관계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우 이상의 관계가 아니며 각종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힘의 관계를 통해 한 사람의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려가면서 이 소설은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희생양인 강지영과 그를 도와주는 권기현교수의 만남을 그리면서 두사람의 관계가 발전할 것처럼 그린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결국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악마성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허물을 이용하는 모습이 바로 사회의 악마성이다. 이러한 악마성은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다는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덮기 위해 때마침 나타난 피해자 강지영을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어 자신들의 문제를 덮고자 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위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게 총을 드는 모습에 광분하여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은 오히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빨갱이라고 무력으로 진압했던 광주의 모습은 이러한 악마성의 극명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이제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사랑이 나를 살린 것처럼, 이재 내 사랑이 그를 살려야 한다"라고 마치는 장면은 이 사회의 악마성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치유를 가해자가 하는 것이 맞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의 치유를 할 수 없다. 결국 치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며 그러한 사랑의 나눔을 통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시대 예수를 다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스스로 예수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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