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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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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석제의 소설집 '홀림'에서도 성석제는 여전히 그 재치 만발의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여태까지 읽어혼 성석제의 소설들과는 좀 다른 느낌의 소설들이 몇편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홀림'과 '협죽도 그늘 아래서'이다. 두 소설은 다른 소설들처럼 가볍고 재기발랄하다기 보다는 조금은 차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주변minority적인 소재에서 많은 사람majority들의 공감을 줄 만한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협죽도 그늘 아래서'는 혼인하자마자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한 미망인의 일생을 담은 소설이다. 흔히 말하는 한스러움이라던가, 어딘가 모를 애수를 나타내고 있다. 전쟁의 상처가 워낙 컸으니 사실 이런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을수 있는 만큼 무언가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힘들 것 같지만, 이 소설은 '평균 이상'의 인상을 남겨준 것 같다. 한 미망인과, 소설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협죽도 그늘',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 가시리가 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하나가 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서 그 인상을 깊이 느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홀림'은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가 어떻게 해서 소설에 가까워지고 또 마침내 '소설쓰는 인간'이 되었는가를 한 아이(들)의 홀림에 빗대어서 쓴 글이다.

그때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공파가 혈연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p.124)

아이는 스스로를 쪼개기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스스로 분류해 놓은 각각의 세상 끝을 자신의 발로 디뎌보려고 했다.(p.142)

이 두문장은 그가 어떻게 '소설쓰는 인간'이 됐는가에 대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큰 인상을 남겼기에 옮겨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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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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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공동묘지로 갔던 순간까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또한 회상 속에서도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충실이 모든 덕목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충실은 우리들 삶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충실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은 수천의 순간적 인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종종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인 타산에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자기가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 사비나의 마음을 매료시킬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녀를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비나를 매혹시킨 것이 충실이 아니라 배반임을 알지 못했다. <충실>이란 말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 아버지를 회상시켰다. 소도시의 청교도였던 그의 일요일 취미는 해지는 숲의 모습과 화병에 꽂은 장미꽃다발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버저지 때문에 그녀는 벌써 아이 때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동갑내기의 소년에게 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일 년 내내 그녀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피카소의 복사물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것들을 웃음거리로 보고 재미있어 했다. 자기 동급반 소년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피카소의 이 입체파 그림을 사랑했다. 고등학교 졸어 후 그녀는 이제 드디더 자기 집을 배반할 수 있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프라하로 갔다.

배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런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배반이란 무엇인가?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비나는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처럼 그려서는 안되었다. 그때는 의무적으로 소위 사회주의사실주의에 충실해야 했고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공산주의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시기였다. 아버지를 배반하려는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다른 아버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랑을 금했고(당시는 청교도적인 시기였다) 피카소를 금한 아버지와 꼭같이 엄했고 편협했다. 그녀는 어느 프라하 극단의 형편없는 배우와 결혼했다. 그것은 그가 행패부리는 사람으로 소문 나 있어 그녀의 두 아버지에게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하루 뒤에 그녀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슬픈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장미꽃다발이 꽂힌 화병을 그렸고 피카소를 싫어한 것이 그토록 나빴단 말인가? 열네살 먹은 자기 딸이 임신하여 집에 오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것이 그토록 비난스런 것인가? 그가 부인 없이 살 수 없었다는 것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운가?

다시금 배반에 대한 욕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남편에게(남편에게 그녀는 더이상 행패꾼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성가신 술주정뱅이를 보았다) 자기가 그를 떠날 것이라고 통보했다.

B를 위해 A를 배반했던 사람이 B를 배반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A와 화해했음을 반드시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이혼한 이 여류화가의 삶은 배반당한 그녀 양친의 삶과 같지 않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상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각 배반은 우리를 원조배반의 시발점으로부터 점점더 멀리 떨어지게 한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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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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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 같으니! 너는 네 입으로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게 너의 진심이라고 믿었단 말이냐, 네가 빠져 있는 모든 사랑,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 이런 것을 단숨에 꿰뚫어서, 그 뒤편에 숨어 있는 네 영혼의 깊고 깊은 곳, 너의 진정한 소망이 숨겨져 있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아니 그런 능력이 인간인 너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어쨌든 너는 다시 한번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내가 다시 너에게 물을 것이다. 지금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내가 정말 너를 속였는지, 아니면 네가 네 자신을 속였는지를!

아르투어 슈니츨러, 한시간만 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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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인문학연구소고전총서서양문학 6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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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 웬지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한층 더 깊숙이 나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여느때 끝나곤 하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내게 전에는 몰랐던 내면이 한 층 더 있다. 모든 것이 지금은 그 또 한층의 내면까지 간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편지를 한 장 썼는데, 쓰다 보니 내가 여기 온 지 3주일이 되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다른 어딘가에서라면, 이를테면 시골에서라면 3주일이란 하루 같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3주일은 여러 해이다. 나는 짧은 편지도 쓰지 않는다. 내가 바뀌고 있다는 말을 뭣하러 누군가에게 한단 말인가? 내가 바뀌고 있으면 나는 전에 나였던 내가 아니잖은가.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면 이제 나는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게 분명하다. 낯선 사람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야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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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세미나리움 총서 12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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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New Yoker)지(誌)의 조지프 미첼은 아무리 호의적으로라도 '소시민Little People'이란 표현을 쓰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그들은 나나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큰' 사람들이다." 비록 아무도 이 익명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해도, 그들의 삶은 여러분이나 나의 삶 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남자든 여자든 그런 사람들이 개인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역사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과 실천이 변화를 일궈낸다. 그것은 문화와 역사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실제로 그래 왔으며, 특히 20세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전통적으로 '평범한 사람들Commom People'이라 불린 보통 사람들을 다룬 이 책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에릭 홉스봄,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원제 : Uncommon People)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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