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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흑백사진처럼 아스라이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희미하고도 또렷하게 남아 잊혀지지 않는 기억. 가슴 한켠에 고이 간직해 놓은 그 것은 사랑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돈암동으로 이사 간 후배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 곳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본능처럼 되살아오는 그와의 추억이 남아있다.
그 남자의 집은 어디쯤일까. 높은 빌딩이 빼곡히 들어서 이젠 그 옛날이 아닌 고향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기어코 그 남자네 집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 시절, 그녀에게 있어 그는 고달픈 삶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수많은 목숨들이 죽어나가고, 생계를 위해 사회로 뛰어들어야만 했던 현실 속에서 그와 그녀는 사랑을 했다. 그러나 전시상황마저 잊어버리게 만든 꿈같은 첫사랑은 어지러운 현실에게는 사치였나 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넉넉치 못 한 집안 형편과 앞으로의 미래, 이 모든 것들은 그와 그녀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사랑했고, 또 사랑하고 있는 '그 남자'는 제 엄마에게만 기대는 어리광쟁이였고, 경제적 능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남자였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까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한 순간의 환상 같은 사랑보다는 편안한 안식처와 안정을 그리워했다. 전쟁을 겪으며 하나 둘 잃어버리게 된 가족이라는 테두리와 아늑한 집, 그리고 꿈. 이 모든 것들을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반듯한 은행원 민호와의 결혼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녀'와 '그 남자'의 어머니, 남편의 어머니, 춘희의 어머니, 나, 그리고 춘희. 이 소설이 단순히 젊은 시절의 연애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유는 주변에서 시대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갔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가난을 불러왔고, 그러한 가난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책임을 강요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잃은 수많은 가장들과 청년들. 부재하는 그들을 대신했던 건 여성들의 가녀린 손이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존심이나 꿈, 나 자신의 안식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오로지 두 번째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책임감으로 각박한 세상을 치열하고 억척스럽게 살아내었다. 생각해보면 총부리를 겨누고 전장을 뛰어다녔을 남자들보다도 더 강인하고 희생적이었던 건 바로 우리네 어머니 혹은 언니, 누나였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사회로 나아간 그들이었다. 총이나 칼 따위의 무기도 없이 소리 없는 전쟁터에 서있었다. 비록 그네들의 책임감은 희생을 낳고, 희생은 원치 않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희망찬 오늘이 올 수 있었다.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마저 앗아가 버린 전쟁과 그 속에서 살기위해 발버둥친 우리네 여성들. 이 모든 것을 녹여낸 이 소설 속에서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연애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는 작가의 말과는 달리 내게 보여 지는 것은 고단하고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들이지만, 나와 그 남자, 남편, 어머니, 가족, 더 나아가 혼란과 상실의 중심에서 함께 부둥켜안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수많은 이들까지 그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은 분명 고통 속에 가려진 '사랑'일 것이다.
그 남자는 이제 없다. 포옹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별을 예언하는 것만 같았던 물처럼 담담하고도 완벽한 포옹. 그 포옹은 가시 같은 현실에 베어 상처입고 살아온 그녀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그 남자네 집은 어디쯤일까. 이젠 세상을 떠난 그인걸 알면서도 다시금 떠올려보는 그 남자네 집은, 힘겹게 살았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그 옛날에게 건네는 안부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