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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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는 속이 울렁거려서 오랫동안 읽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편집인 이 책에 모든 소설 속 배경은 어둡고 습하고 칙칙하다. 거의 모든 소설의 앞부분에는 시체가 등장한다. 시체가 등장하기에 추리소설을 살짝 기대했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도시 속 좀비 같은 시체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소설은 '누가 어떻게 누구를 왜 죽였는지' 말하지 않고 그저 '죽음' 자체를 말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안타깝거나 잔인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시체는 <문득>의 다음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살아있는 사람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  

   
 

 산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죽은 사람도 사람이야. 자기가 살아 있다거나 죽었다고 느끼는 건 어느 한 순간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아 내가 살았구나, 아, 참, 내가 죽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구.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 거야.(110쪽)

 
   

 이 말을 읽고 나서야 책이 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지 않고 살지만 죽음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죽음의 과정이나 죽음 이후의 모습이 어떨지 천당이란 곳이 없다면 죽음은 실제로 이런 얼굴을 갖고 있지 않을까? 

 여기서 나아가 소설 속 인물들은 동물과도 구별이 가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앙상한 다리를 가진 장애인이 화자로 등장하는 <아오이 가든>,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해 서서히 죽어가는 실험실 쥐와 비슷한 처지의 미아와 '나'가 등장하는 <마술 피리>, 그 밖에도 임신부가 사람이 아닌 개구리를 낳기도 한다. 구더기, 쥐, 고양이는 단골로 등장한다. 그래서 질병과 썩은 내가 진동하는 도시가 배경이고 지은이는 우리가 보는 도시 이면에 곪아있는 풍경, 인간 내면에 썩아가는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을 그리고자 한 건 아닐까 싶다.  

 읽을 때는 엽기적이고 처참한 느낌이 들어 왜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은근히 다음 작품은 또 어떻게 그려졌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조만간 <재와 빨강>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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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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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지은이가 쓴 <리처드 로티>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철학책들은 읽다가 잠깐 내려놓으면 그것으로 영영 다시 들춰보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은 그나마 다른 철학책들보다는 쉽게 읽히는 편이었고 로티의 프래그머티즘 사상에 공감하면서 읽어 내려갔던 듯하다. (하지만 지금 그 사상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그저 웃지요..-_-;;) 아무튼 그 책을 읽은 영향인지, 지은이가 아는 언니와 동명이인이라 친숙하게 여겼는지, 앞표지에 철학이라는 단어가 그리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일상적인 자기 이야기로부터 모든 꼭지를 풀어나간다. 이 앞부분이 무척 재미있고 공감이 가서 철학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도 비교적 친근하게 다가왔다. 거기에 문학작품의 내용과 철학을 연결지으니 한결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서문에서 지은이가 밝혔듯이, 철학자들이 과학적인 철학을 표방해 객관성, 합리성, 보편성에 계속 집착한다면 많은 독자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를 잘 아는 지은이는 '문학적인 철학'을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서려 한다.   

 얼마 전에 내가 알라딘에서 산 책목록과 도서관에서 빌린 책목록을 엑셀파일로 저장했는데 너무 소설에만 치우쳐 있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그나마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소설만 읽지 말고 인문학 분야의 책들을 고루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철학책도 좀 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지은이는 철학 박사이자 철학을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교수님인만큼 지하철에서 오가며 소설을 보아도 그 안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읽어내는 매의 눈을 지녔다. 같은 책을 읽었어도 내 생각은 소설 안과 내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지은이는 나의 상상 밖에 철학적 사고와 결부시켜 소설을 더 풍요롭게 해석했다. 이렇게 연결짓는 것 자체가 내게는 매우 창조적으로 여겨졌다.  

 책의 내용을 꼭지마다 정리하고 싶지만 그러자면 너무 길어질 듯싶고 한 두 꼭지만 뽑아낼 자신은 없다. 평소 내가 한번쯤 해 보았던 고민들과 가끔씩 들어보았던 철학적인 논의들이 쏟아져 나와 읽기 쉽게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없어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머리에 생각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그만큼 얻어갈 내용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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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도서출판 아고라 네이버 카페에서 리퍼브 도서를 구입했다. 새 책이나 다름없는 책 4권을 만원에 - 배송비까지 포함해서 - 구입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아고라의 독자위원이 되었다. (아마 한 달에 한 두 번 책을 받고 서평을 쓰는 일을 하게 될 듯싶다.)  

 좋은 책을 만드는 회사인데 규모가 작아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홍보를 조금이나마 돕게 되었다. (그래봤자 내 서재에 오는 분들은 거의 없는 듯 하지만ㅠㅠ) 그렇지만 서평이나 언급 횟수가 많아지는 것이지 실제 내가 느낀 것보다 좋게 말한다거나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다. 출판사에서도 실제보다 미화시키거나 엄격하게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정확히 밝혀주셨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도 <언런던> 1,2권을 사면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1,2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했던 듯 싶은데 나도 뒤늦게 알고 좀 안타까웠다. 이번에는 <냉장고에도 쇼핑몰에도 없는 것>을 반값 할인한다고 하니 평소 자기계발서에 관심있으시고 '비만, 경제적 궁핍, 외로움'이란 단어에 반응하시는 분들께 권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해당되는 이야기인 듯.. 참 읽지도 않고 권하려니 쑥쓰럽다;;  

  

  덧으로 오늘 <마당에 나온 암탉>을 보았는데 기대가 큰 만큼 안타까움도 컸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이 매우 발전했다고 칭찬 일색이어서 보았는데, 파스텔 톤 화면과 귀여운 그림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들쑥날쑥하고, 교훈만 지나치게 전달하려는 이야기 구성이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많은 제작비와 수고를 들였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는 <토이 스토리3>처럼 어른들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울컥하는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을 기대한다. 그러고보니 <소중한 날의 꿈>도 평이 좋던데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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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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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읽은 러시아 관련 책들은 대부분 논문에 가까운 학술 서적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현대사를 다룬 책이라 해도 마치 몇 백년 전 역사책을 읽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러시아어과인지라 실제로 10개월 정도 모스크바에서 언어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 받은 러시아인과 러시아 문화는 책에서 읽고 상상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다녀온 것은 2007~2008년 고작 10개월이지만 지은이는 러시아 통역사로서 1980~90년대,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이 러시아에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직접 체험한 경험이 이 책에 녹아들어 러시아가 낯설지 않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러시아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우선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보드카를 사랑하는지 보드카와 얽힌 일화와 재담을 지은이는 소개한다. 재미있는 재담이 무척 많아 공책에 몇 가지 옮겨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한 가지 옮겨보면,  

 "절주령 시행 후 이혼이 급격히 증가했다. 거의 10년 만에 맨 정신으로 부인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다."                                                                      

                                                                                                          - 본문 88쪽 

 하지만 이들의 지나친 보드카 사랑이(절주령 시행 즈음에도 러시아인들의 25%이상이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한다) 웃고 지나칠 일만은 아니다. 그만큼 러시아 현실이 각박하고 살기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니까. 요네하라 마리는 이런 점을 꼬집으며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면서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아픔들, 그리고 그 아픔을 승화시키는 낙천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택시기사의 입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북한 학자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현대 사회(1980,90년대)가 어떤 진통을 겪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러·일 양국 회담이 있을 때마다 통역사로 일했기에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가까이서, 여러 번 보았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들의 성격과 일화를 유쾌하게 풀어내는데, 이를 읽고 있노라면 그동안 역사책 속에 활자로 박혀 있던 이름들이 책을 박차고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 고르바초프는 아직 살아있다 - 느낌을 받았다. 이외에도 유명한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가 시골 화장실에서 넘어진 이야기, 그의 제자인 로스트로포비치가 일본 스모 선수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시종일관 러시아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 때문인지,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내가 느꼈던 그 냉랭함 속에 숨겨진 그들의 진짜 모습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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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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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문학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아무래도 번역에도 주의를 돌리게 된다. 저번에 읽은 <번역의 공격과 수비>와 더불어 번역가 지망생에게 매우 유익한 책이다. 꼭 번역가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영미권 문학 전공자와 문학 전공자, 해외도서 출판편집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저번 안정효 선생님처럼 저자 이희재 님이 얼마나 한국어에 애착을 가지는지 얼마나 한국어를 면면히 연구했는지 절절히 느껴진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번역가라면 먼저 우리 언어를 바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저자는 원어와 번역어라는 말 대신 '출발어'와 '도착어'라는 단어를, 직역과 의역이라는 말 대신 '길들이기(domestification)'와 '들이밀기(foreignization)'라는 다소 생소하지만 바로 이해가능한 고유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왜 '길들이기'(직역)보다 '들이밀기'(의역)가 중요한지 설명한다. 길들이기는 출발어인 영어를 존중해 우리말을 영어에 맞추는 작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길들이기를 중시했고 그 결과 요즈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약'이나 '조리법'과 같은 우리말을 냅두고 '매니페스토'나 '레시피'같은 영어를 우리말처럼 사용한다. 단어뿐만 아니라 문법 구조도 점차 변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어나가기 위해 영어를 적극적으로 우리말에 맞게 바꾸는 들이밀기를 권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역글과 이를 편집자가 윤문한 글을 보고 원문과 번역문이 너무 바뀌는 것이 아닌가 충격을 받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다소 이해가 갔다.  

 또 충격을 받은 것은 저자가 종수로는 500종 이상, 권수로는 1000권이 넘는 사전을 지니고 있다는 대목에서였다.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프랑스어 등 여러 개 국어를 섭렵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1000권이라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영어와 한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의 특성을 예리하게 잡아내어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어를 어떻게 써야 할 지 고심한 흔적을 책 중간중간에 회색종이로 나타낸다. 이 회색종이에는 저자가 새롭게 정리한 영한 단어가 정리되어 있다. 번역을 하다 적확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들추어보면 매우 유용할 듯싶다. 또 얼마나 우리가 널리 쓰는 영한 사전이 부실한지, 얼마나 영일 사전에 기댔는지 저자는 꼬집어 준다. (주입식 교육으로 매일 영한 사전을 추려낸 단어장을 외웠던 나로서는 참으로 뜨악한 일이었다ㅠㅠ)  

 단어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는 자세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더 나은 번역을 만들듯이, 오늘도 야금야금 책을 곱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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