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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삶의 바깥에서 삶을 이끄는 기준이 아니라, 삶의 안에서 그 삶을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소간 학술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종교는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준’과는 달리, ‘형식’은 삶 안에서 그 삶이 어떤 삶인가를 보여 줍니다. 종교적 문헌으로서 기신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기신론을 읽음으로써 알아내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 p35
기신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불교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착각은, 특히 그것이 널리 퍼져 있을 때에는, 착각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따라서 아무도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경전은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불교’는 없는 것입니다. : p46
우리가 기신론에서 알아내어야 할 것은 그와 같이 ‘사실은 없는데도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되는’ 그것을 있다고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 어째서 억만 중생을 제도하는 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 p60
그 기본틀은 서로 맞붙어 있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편의상 ‘마음의 중층구조’ 또는 ‘세계의 중층구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위층에는 마음과 대상의 구분을 포함하여 ‘일체의 구분이 배제된’ 진여가 있고 그 아래층에는 마음과 대상의 구분, 그리고 대상 상호간의 구분이 존재하는 생멸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중층구조’와 ‘세계의 중층구조’는 두 개의 중층구조가 아니라 마음과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위층과 그 양자가 구분되는 아래층으로 된 하나의 중층구조입니다. : p69
만약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다면,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파악되고 언어로 기술되는 ‘나의 마음’이 마음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것 때문에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파악되는 마음이 유일한 마음이요 그것 이외에 따로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통념, 때로 확신에 가까운 통념에 대하여 한번쯤은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p86
여기에 ‘상념’이라고 불리는 물건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버리거나 떠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하여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온 경로를 정반대 방향으로 되밟으면서 그것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물건을 버리거나 떠나는 방법이다. : p89
사성제의 고(苦)는 우리가 ‘생멸계’-즉, 변화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것에 따라 마음이 시시각각 움직인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상념을 가지고, 또는 상념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괴로움’과는 달리, 이런 의미에서의 고(苦)는 괴로움으로 지각되지 않습니다. : p91
마음이 일어나는 그 최초의 발단이라는 것을 알 방법이 없다. 그 최초의 발단을 안다는 것은 곧 그것에 뒤따르는 모든 상념을 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이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중생은 본래부터 끝없이 계속되는 상념에 얽매어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이런 뜻에서 “무시무명”이라는 말을 쓴다. : p109
‘원인이 없어지는 것은 “안에서 물든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며, 계기가 없어지는 것은 “밖에서 물든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그 관련을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p113
‘여래장은 실재(不生不滅)와 현상(生滅)이라는 마음의 두 측면이 동일하지도 상이하지도 않은 상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라는 말은 그것이 진여의 자리이기도 하고 무명의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 p116
상념은 어딘가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진여는 상념을 만들어낸 원인도, 상념이 생기기 이전도 아니요, 상념이 일치해야 할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마음을 앞에서 말한 ‘중층구조’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상념이 무명에서 생긴다든지 진여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상념에는 그것이 일치해야 할 표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상념은 그 표준에 일치할 때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그 표준은 상념 속에서가 아니고는 달리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입니다. : p117
진여의 양상은 상념의 ‘원인’이며, 진여의 기능과 경계는 다같이 상념의 ‘계기’입니다. : p123
진여 본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현상계에 그 모습을 드러날 때에는 ‘모든 깨끗한 성질과 훌륭한 공덕’, 또는 더 평이하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려야식에 ‘깨닫지 못함(不覺)’과 함께 그 한 측면으로 포함되어 있는 ‘깨달음(覺)’-즉, ‘깨달음의 본체’(本覺, 覺體)-또한 동일한 특징을 나타냅니다. : p126
‘훈습’에는 그것이 일어나는 부소에 따라 네 가지가 있어서, 끊임없이 상념(染法)으로 흐르게 하기도 하고 진여(淨法)로 돌아가게 하기도 한다. 그 네 개의 부소라는 것은 1) 진여, 2) 무명, 3) 망심, 그리고 4) 망경계이다. 진여는 깨끗한 마음(淨法)이며, 무명은 상념의 원인(一切染因), 망신은 상념(業識), 그리고 망경계는 상념의 대상(六塵)이다. : p129
아려야식은 ‘실재(不生不滅)와 현상(生滅)이라는 마음의 두 측면을 동일하지도 상이하지도 않은 상태로(非一非異) 결합하고 있고’, ‘깨달음(覺)과 깨닫지 못함(不覺)의 두 가지 상호관련된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사물과 현상을 포괄하며 모든 사물과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이 아려야식의 ‘깨닫지 못함’은 ‘상념으로 흐르는 훈습’의 시발점이 되어 ‘깨달음’은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의 시발점이 됩니다. 그러나 물론,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의 시발점인 ‘깨달음’은 또한 ‘상념으로 흐르는 훈습’이 돌아가야 할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 p131
염법훈습에서 망심은 우둔한 자나 수행자에게 의지와 사고를 조장하여 ‘온갖 행위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게’ 하는 데 비하여, 정법훈습에서 그것은 우둔한 자와 수행자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하고 그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향하여 점점 나아가게 하며’, ‘용맹하게 발심하여 열반의 길을 재빨리 달려가도록’ 합니다. 이 점은, 곧 말할 바와 같이, 기신론의 설명 체계에서의 ‘망심’(즉, 상념)의 위치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p136
비유로서조차도, 훈습의 내적 원인(因)인 무명과 진여자체상은 그림에서와 같이 두 개의 상이한 지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려야식이라는 동일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려야식은 우리의 마음이 상념으로 흐르는가 진여로 돌아가는가를 가르는 최초의 분기점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138
무명과 진여자체상, 망경계와 진여용이 상념에 대하여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무명으로서의 상념’이 ‘진여용’을 대면하고 있는 사태는 다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더 간단하게 줄이면, 염법훈습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는 정법훈습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와 다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 p142
즉, 망경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무명으로서의 상념’이라는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대면하는 대상이며, 진여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진여자체상으로서의 상념’이라는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대면하는 대상입니다. : p143
이제, 진여 본체의 양상(眞如自體相)[이 크다는 점]을 설명하겠다. 진여는 우둔한 자건 2승의 수행자건 대승의 수행자건 수행을 마친 ‘깨달은 자’건 가리지 않고 그 누구에게 있어서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그것은 과거 언젠가 생긴 것이 아니요 미래 언젠가 없어질 것이 아니며 끝까지 항구여일하다. 진여는 처음부터 그 본성 속에 모든 훌륭한 공덕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그것은 큰 지혜의 빛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으로 모든 세상을 빠짐없이 두루 비추고 있다. 그것은 참되고 완전한 지식과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변하는 것, 괴로운 것, 참된 내가 아닌 것, 물든 것에서 벗어나 있으며, 맑고 산뜻한 것, 변하지 않는 것, 자유로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간지스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신비스러운 진리가 중단도 부정도 모순도 없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언제나 충만하며 모자라거나 빠진 것이 없다. ‘여래를 감추고 있는 곳’(如來藏)이라든가 ‘진여 그 자체로서의 여래의 몸’(如來法身)이라는 표현은 이것을 나타낸다. : p149
진여는 실재 또는 본체를 일컫는 불교의 용어입니다. : p152
우리의 상상은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여래는 그런 의미에서의 ‘존재’가 아닙니다. 여래라는 ‘존재’는 양상이 없는 진여 그 자체-본체로서의 진여-가 양상을 ‘억지로 부여 받아서’ 나타난 존재입니다. : p154
‘마음의 본성’은 상념을 일으키지 않고(不起), 특정 대상의 지각을 초월하며(離見), 움직임이 없다(無動)는 말은 현재 우리의 ‘마음’-‘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의 마음-과의 대조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우리의 그 마음이 일치해야 할 이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 p157
진여용은 진여자체상을 구현하는 상념이 그 정도만큼 대면하는 대상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진여용은 진여자체상을 구현하는 상념이 그 정도만큼 발휘하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대상으로서의 진여용’은 특정 개인이 그 진여자체상으로 만들어내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임에 비하여, 뒤의 ‘기능으로서의 진여용’은 특정 개인이 그 진여자체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특정 개인은 자신의 진여자체상으로 진여용을 보기도 하고 진여용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진여자체상이 진여용을 대면하는 세상과 무명이 망경계를 대면하는 세상으로 반반씩 갈라져 있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를 두고 진여자체상을 구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기능을 발휘하고 또 그만큼 그 세상에서 여래의 모습을 발견하는 하나의 세상입니다. : p161
진여라는 것은, ... 바로 우리의 마음이나 삶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이상적 형식이요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것에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할 기준입니다. : p162
진여는 그것과 무명이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게’(非一非異) 결합되어 있는 여래장을 통하여 상념을 만들어내며, 또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훈습의 힘으로 상념을 진여로 향하게 합니다. : p163
분명히 말하여, ‘인간의 본성’-또는 진여의 본성, 또는 마음의 본성-이라는 용어에는 우리의 지력으로 완전히 파헤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용어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스러운 의미를 최대한으로 배제하고 말한다면-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출생 이후에 그 수행을 통하여 확립하게 될 ‘좋은 성질’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성은 수행에 의하여 확립된다는 것입니다. : p168
증득은, 만약 여래나 진여가 하는 일도 ‘인식 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래 또는 진여의 인식 작용-즉, 진여가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신론에 의하면, ‘증득의 대상(境界)은 진여이다. 그러나 진여를 “증득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념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에 인식되는 경우를 나타낼 뿐이며, 사실상 증득이라는 것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진여 그 자체의 지적 작용”(眞如智)이며, 이 상태를 일컬어 “법신”, 즉 “전여 그 자체로서의 여래의 몸”이라고 부른다’. 또한, 증득을 이룬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다시, 만약 그에게도 ‘지식을 가진다’는 말이 적용될 수 있다면-그 지식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는 상태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곧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경우의 지식, 이른바 ‘총체적 지식’(一切種智)입니다. 다시, 기신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깨달은 자와 진여와 하나인 자의 마음은 특정한 대상을 대면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로서의 마음”(見相)이 아니라 모든 곳에 두루 미치는 “참으로 있는 것”(眞實) 그대로의 마음이다. 이때 그들의 마음에 파악되는 것이 곧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본성”(諸法之性)이다. : p174
이때까지 기신론은, 진여에는 이러이러한 ‘깨끗한 성질과 훌륭한 업적’-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고 중생은 그 성질과 업적을 본받아서 이러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방금 제가 한 말에 의하면, 진여에 그런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진여가 ‘원래’ 그런 것이 때문이 아니라 ‘수행자’-즉, 중생-가 6바라밀로 대표되는 그의 ‘수행’을 통하여 진여를 그런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p179
기신론에서는 ‘믿음을 이루는 발심’의 단계에서 일으켜야 할 ‘마음’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으로서, 이것은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며 그리워한다는 (正念) 뜻이며, 둘째는 “깊은 마음”(深心)으로서, 이것은 일체의 선행을 쌓는다는 뜻이며, 셋째는 “大悲대비의 마음”(大悲心)으로서, 이것은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는 큰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 p180
여래가 대면하고 자아내는 진여용은 중생이 대면하고 자아내는 망경계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사태를 가리킬 수 없으며, 하나의 동일한 사태가 진여용으로도 되고 망경계로도 되는 것입니다. 진여용은 중생의 마음(즉, 상념)이 진여자체상에 가까운 상태에 있을 때 그 마음이 대면하고 자아내는 대상을 특징짓는 용어이며, 망경계는 중생의 마음이 진여자체상에서 먼 상태에 있을 때 그 마음이 대면하고 자아내는 대상을 특징짓는 용어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중생의 마음이 진여용을 대면하고 만들어낼 때 그 마음은 진여자체상에 가까운 상태로 되며, 중생의 마음이 망경계를 대면하고 만들어낼 때 그 마음은 진여자체상에서 먼 상태로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p186
‘다섯 가지 수행’ 중의 처음 네 가지-자선과 시여, 계율의 준수, 수욕의 인내, 결단과 분발-는, 훈습의 용어로 말하자면 진여용에 해당합니다. 말하자면, 이 네 가지는 이 세상에서 여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自然) 그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을 대표합니다... 그 네 가지 수행을 할 때 중생은 그 여래의 행적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적을 모방함으로써 중생은 그것을 만들어낸 여래의 마음-진여자체상-에 감염되고 또 그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 p188
걸어갈 때나 서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수행자는 늘 ‘그침’(止)과 ‘살핌’(觀)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즉, 그는 한편으로는, 모든 현상은 그 본성에 있어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선악의 행위(業)는 원인과 계기에 의하여 만들어지며 거기서 생기는 苦樂고락의 결과(報)는 결코 지워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선악의 업보는 원인과 계기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물의 본성은 상념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침’의 수행이 우둔한 자로 하여금 세상 일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게 하고 二乘이승의 수행자로 하여금 비겁하고 나약한 생각을 버리게 할 수 있다면, ‘살핌’의 수행은 2승의 수행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무관심한 좁고 용렬한 마음을 그만두게 하고 우둔한 자로 하여금 선한 자질을 닦지 않는 게으른 마음을 버리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침’과 ‘살핌’이라는 두 가지 수행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서로 협응해야 하며, 서로 떨어져서 각각 따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침’과 ‘살핌’이 동시에 갖추어지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깨달음의 지혜(菩提之道)에 도달할 수 없다. : p190
‘그침’과 동의어로 사용된 ‘奢摩他’사마타는 흔히 ‘三昧’삼매라는 한자어로 표기되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의 音寫음사입니다. 그리하여 ‘그침의 수행’은 ‘삼매의 수행’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기신론은 그침과 삼매에 관하여 여러 문단에 걸쳐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결국 ‘상념을 그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올바른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상념을 그친다’는 것은 ‘상념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을 지우는 것이며 생각을 지운다는 생각조차 지우는’ 것입니다. ‘그침’ 또는 ‘삼매’와 진여의 관련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 ‘“삼매”라는 것은 온 세상이 하나임(法界一相)을 아는 것, 다시 말하여, 모든 부처의 몸(法身)과 중생의 몸(衆生身)이 하나요 둘이 아닌 상태(平等無二)를 나타낸다. 이런 뜻에서 그것을 “한 길을 가는 삼매”(一行三昧)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사실은, 진여는 삼매의 근본이라는 것, 그리고 진여 삼매를 열심히 행하면 그것은 수많은 종류의 삼매(無量三昧)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여는 삼매의 근본’입니다. ‘그침’ 또는 ‘삼매’라는 수행 방법이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은 진여에 대한 직관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상념의 정지’(止)는 ‘진여에의 직관’ 또는 ‘진여에의 몰입’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192
‘그침’의 수행이 현상의 이면으로서의 진여에 대한 동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살핌’의 수행은 진여의 표면으로서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 p194
眞善美聖은 ‘여래의 깨끗한 성질과 훌륭한 공덕’-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총칭하는 이름이며, 학문과 도덕, 예술과 종교는 그 여래의 성질과 공덕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 p203
중생은 수레를 타고 여래의 땅으로 간다는 비유를 좀더 사실적으로 풀이하자면, 중생의 마음은 방편의 힘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 p213
방편은 아무 목적에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수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깨달음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진여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이 지향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진여는, 기신론에 사용된 용어로, ‘心性’심성-마음의 본성-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수단-목적 관계’라고 부른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방편과 그 ‘목적’의 관계는 ‘심성-방편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단-목적 관계에서 우선 순위는 ‘수단과 목적’-수단을 써서 목적을 달성한다-으로 되는 반면에, 심성-방편 관계에서 그것은 ‘심성과 방편’-심성이 방편으로 표현된다-으로 됩니다.) 앞의 시에 나오는 ‘나투다’라는 동사는 심성-방편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방편은 심성 또는 진여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라는 용어는 수단-목적 관계에는 결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수단이 목적의 표현은 아닌 것입니다. 방편이 심성 또는 진여의 ‘표현’인 한, 거기에는 진여가 그대로 들어 있지만, 수단에 목적이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심성-방편 관계에 비추어 볼 때, 방편은 진여의 ‘표현’이며, 진여를 표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여를 표현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것은 일단 진여 본체의 현상계적 표현인 진여자체상과 진여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제14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 진여자체상과 진여용, 그리고 또 한편으로 망심(무명)과 망경계는 각각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는 별개의 사물이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직 하나의 세상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천하 만물이 ‘진여의 표현’입니다. 만물 중에 진여를 표현하지 않는 것, 여래가 ‘나툰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진여와 생멸이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二門 不相離), 또는 더 간단하게, 현상은 본체의 표현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무엇이 방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은 이 세상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 곧 이 세상 바로 그것이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됩니다. : p217
앞의 제13항목에서 인용한 ‘진여용’에 관한 설명을 보면, 거기에는 여래의 모습이 ‘때로는 가족이나 부모나 친척으로, 때로는 하인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원수로, 때로는 이른바 “네 가지 교육적 자세”(四攝)로 나타난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여래의 모습’은, 정법 훈습의 외적 계기가 되기 전에는, 단순히 망경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래의 모습’-즉, 여래의 ‘나툰’ 모습-인 한, 그것은 중생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향하도록 하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여래의 ‘나툰’ 모습이라는 점에서 보면, 가슴을 저미듯이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나 길가에 핀 한 송이 꽃도 그런 여러 가지 ‘여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 p219
언설이 아닌 사물이나 현상의 경우에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마음에 진여자체상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밖에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p223
아함경에서 석가모니가 ‘가르침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로 수행승들을 질책했을 때의 그 ‘의미’는 언어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일상적 의미가 손가락질하는,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는 ‘비일상적인’ 의미입니다. 석가모니는 그 일상적 의미를 방편으로 하여, 그것이 닿지 않는 그 너머의 비일상적 의미를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짊어지고 가지 말고 버리고 가라고 말한 뗏목은 바로 그 일상적인 의미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언어가 표면의 일상적 의미와 이면의 비일상적 의미라는 2중의 의미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방편으로서의 언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함께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 또는 위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상적 의미와 비일상적 의미가 동일한 문법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해서, 후자를 전자로 바꿔치기 하면서 그것으로 비일상적 의미가 이해된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 p225
서양의 용어로 ‘言語主義’언어주의와 ‘맹목적 암기’, 그리고 중국의 유학 또는 性理學성리학에서 말하는 ‘佔畢’점필은 다같이 교과의 지식을 그 ‘의미’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언설로만 배우는 행위와 그 결과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언어주의와 점필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는 각각 ‘內面化’내면화와 ‘自得’자득입니다. ‘내면화’는 교과의 지식이 학생의 바깥에 언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몸안’에 들어 간다는 것을 뜻하며, ‘자득’은 언설이 언설로서의 행태를 잃어버리고 학생 자신의 ‘마음’으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 p235
보통의 경우에 ‘이타’에 대비되는 것은 ‘利己’이기일 것입니다마는 불교 수행의 방향을 나타내는 말로 ‘이기행’ 대신에 ‘자리행’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기’와 ‘자리’는 그 造語形式조어형식에 있어서 명백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利己에서 利는 己(이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인 반면에 自利에서 自는 그 동사의 주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는 경우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자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는 경우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여 ‘이기’는 ‘이타’와 ‘개념상’ 모순된다는 말은, ‘사실상’으로는, 이기적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경우-‘너 좋고 나 좋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이기적인 동기에서 빚어진 행동이 그 부산물로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 p242
지관문 수행과 교과 공부는 다같이 ‘心性涵養’심성함양-즉, 학문과 도덕, 예술과 종교에 가능한 한 깊이 입문함으로써 그 이면에 들어 있는 심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적 삶은, 간단하게 말하여, ‘교과를 공부하면서 사는 삶’-즉, 교과를 공부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248
‘기신론에는 “모든 중생은 원래 열반에 들어가 있다”라는 경전의 말이 인용되어 있고, 또 “모든 사물과 현상은 원래 그 자체로서 열반”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것은 “사바가 涅槃열반”이라는, 보다 널리 알려진 말로 바꿀 수 있다. “사바”는 열반에 들어가기 전에 중생이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忍土)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불교에서는 사바가 열반이라고 말하는가?... 기신론에서 그 말은 사바와 열반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사바를 떠난 다른 곳에서 열반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p258
불교에서 말하는 “無明”무명-밝지 않음-은, 현상적으로는, 진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도덕적으로 드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俗物속물은 무명의 전형적인 표현 형태이다. 진여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이 진여를 향하여 노력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면에서 부족한 만큼 자신도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진여를 향하여 노력할 때, 그 노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 p264
‘혹시, 천하를 이롭게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기운을 뽐내는 동안, 사람들은 내심 은근히 남모르는 이익을 도모하면서, 저절로 잘 돌아가는 세상을 공연히 어지럽히고 있던가? 실지로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 또한, 그 도움을 받기 전부터 이미 추구하고 있던 자신의 사욕을 더욱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이, 결국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아무도 진심으로는 믿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사욕을 추구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던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기르고 가꾸는 것이 삶의 으뜸가는 목적임을 망각하고 사람들은 그 일과는 하등 관계없는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삶인 양 착각하고 있던가? 올바를 지혜만 있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를 태우면서 헛되이 심신의 기력을 소모하고 있던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몸과 마음을 기르고 가꾸는 그 일을 하는 데에 하등 부족할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한 평생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만 가지려고 허우적거리면서 스스로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있는가?’ : p268
4. 이 논술을 지은 목적은 여덟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이 논술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괴로움(苦)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즐거움(樂)을 얻도록 하는 데에 있을 뿐, 결코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얻는다든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이 논술의 목적은 여래의 가르침의 참뜻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풀이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을 바로 알아서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 논술의 셋째 목적은 마하야아나의 가르침에 합당한 자질을 이미 상당히 갖추고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가르침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물러섬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으며, 넷째 목적은 그 자질을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한 중생으로 하여금 마하아야아나의 믿음을 열심히 닦고 익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다섯째로, 이 논술의 목적은 惡業의 장애를 지워버리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착한 마음을 복돋우고 어리석고 교만한 마음을 멀리하며 사악의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여섯째로, 이 논술의 목적은 ‘想念의 停止’[止]와 ‘本質의 洞察’[觀]을 닦고 익히는 방법을 보여 줌으로써 우둔한 자들과 二乘의 수행자들이 가지기 쉬운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데에 있다. 일곱째로, 이 논술의 목적은 생각을 專一하게 하는[專念] 길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 앞에 다시 태어나서 믿음에 흔들리거나 물러섬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여덟째로, 이 논술의 목적은 수행의 利點을 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힘써 정진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상이 이 논술을 지은 목적이다. : p309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에서 苦와 樂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우리가 보통 ‘괴롭다’든다 ‘즐겁다’고 하는 것이 苦와 樂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의 고와 락은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이 ‘변화의 세계’[生滅界]에 머물러 있는가 그렇지 않고 ‘절대의 세계’[眞如]에 돌아가는가의 차이를 나타낸다. : p311
마하아야아나의 본체는 1) 모든 것을 포괄하며,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그것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것[一切法], 2) 그것은 ‘있는 그대로’라는 것[眞如], 3) 거기에는 ‘이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며 저러저러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구분[差別]이 없다는 것[平等], 4)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만큼,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不增減]이다. 말하자면, 일체법, 진여, 평등, 부증감은 마하아야아나 본체의 특징을 나타내는 네 개의 언어적 규정이다. : p320
‘眞如用’은 진여의 특징을 구현하는 행동을 통하여 중생이 진여에 접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진여의 특징을 구현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여래가 할 만한 행동, 또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여래의 대행자들’이 하는 행동이며, 이 행동을 보고 그것을 따라할 때, 중생은, 비록 진여의 특징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여를 체득하며 진여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 p323
‘일법계의 대총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총괄하는 것, 즉 ‘總體’[一法界]를 한꺼번에 파악하는 것[總相]-다시 말하면 개별적인 사물을 하나씩 한씩, 각각의 특징[別相]을 별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하며, ‘법문의 체’라는 것은 사물의 외부적 특징[相]이 아닌 본체[體]를 말하는 것이다. : p327
‘염법’은 현상계에서 지각되는 대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 형상도 동시에 지칭한다. : p333
23. ‘깨닫지 못함’[不覺]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不覺의 이 세 양상은 不覺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첫째는 ‘無明의 발동’[無明業相, 業相]이다. 이것은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마음의 동요를 ‘業’이라고 부른다. 깨달은 상태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이며, 마음의 동요는 ‘괴로움’[苦]을 가져온다. ‘괴로움’이라는 결과는 ‘無明’이라는 원인과 떨어질 수 없다. 둘째는 ‘認識 主體의 성립’[能見相, 見相]이다. 마음이 동요함으로 말미암아 인식의 주체가 생기며, 마음의 동요가 없으면 인식의 주체도 없다. 셋째는 ‘認識 對象의 성립’[境界相, 現想]이다. 인식의 주체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인식의 대상이 나타나며, 인식의 주체가 없으면 인식의 대상도 없다. : p352
24. ‘인식의 대상’이라는 외적 계기[境界緣]로 말미암아 다시 ‘깨닫지 못함’의 여섯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差別的 知覺’[智相]이다. 인식의 대상이 나타남으로써 마음에 ‘가지고 싶어하는 것’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의 구별이 생긴다. 둘째는 ‘差別的 知覺의 連續’[相續相]이다. 차별적 지각으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이 교차되며 상념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셋째는 ‘執着’[執取相]이다. 차별적 지각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지각의 대상에 대한 好惡, 그리고 그로 인한 괴로움과 즐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그것에 집착한다. 넷째는 ‘언어와 개념에 의한 計度’[計名字相]이다.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아닌 언어와 개념이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착각한다. 다섯째는 ‘行動’[起業相]이다. 공허한 언어와 개념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를 추구하고 그것에 집착하면서 갖가지 행위를 한다. 여섯째는 ‘행위로 인한 괴로움의 유발’[業繫苦相]이다. 행위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겪게 되고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일체의 상념과 그 대상은 無明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며 일체의 상념과 그 대상은 모두가 ‘깨닫지 못함’의 양상[不覺相]이라는 것이다. : p354
‘무명’을 거점으로 하여 일어나는 훈습[無明薰習]은 두 가지 작용을 한다. 하나는 훈습의 근본[根本薰習]으로서,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고’를 일으킴으로써 편견과 애착을 가지도록 하는 것[所起見愛熏習]이다. : p380
‘진여용’은, 간단히 말하여, 중생계(즉, 因地)에서의 여래의 활동이 중생의 사고와 행위를 진여로 향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여의 용이 정법훈습의 계기[緣]가 된다는 것은 이런 뜻에서이다. : p399
눈에 보이는 모든 물체는 원래 ‘마음’이며 외부적인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형상이 없는 한, ‘허공’이라는 말로 기술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식에 파악되는 모든 대상은 오직 마음의 헛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마음에 헛된 움직임이 없으면 모든 대상이 사라지며 오직 하나인 ‘참마음’[唯一嗔心]만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게 된다. ‘여래의 넓고 큰 지혜’[如來廣大性智]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상념에 나타나는 허공[虛空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p411
79. ‘상념의 정지와 본질의 통찰’[止觀問]의 방법은 무엇인가?-‘상념의 정지’[止]라는 것은 상념에 지각되는 일체의 특징[境界相]을 정지키시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침’[奢摩他]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며, ‘본질의 통찰’[觀]이라는 것은 원인과 계기에 의하여 일어나는 현상계의 변화[因緣生滅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살핌’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은 점진적으로 동시에 실천하여, 마치 문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처럼, 한꺼번에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 p448
86. 그런데, 만약 사람이 오직 ‘상념의 정지’[止]만을 수행한다면 마음이 침체되거나 태만해지고, 세상의 온갖 선을 기뻐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널리 구제하려는 비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 ‘본질의 통찰’[觀]이라는 수행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 p461
觀의 대상은 생멸인연상이다. 그리고 觀을 ‘본질의 통찰’이라고 번역할 때, 이 ‘본질’이라는 것은 ‘현상의 본질’을 뜻한다. 물론, 진여도 어떤 의미에서는 ‘현상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현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 본질을 통찰해낸다는 것이다. 以是故苦-이것이 바로 苦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그 본질로 하는 생멸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苦이다. 苦에서 벗어난 상태로서의 樂도 이와 일관되게 해석해야 한다. : p462
상념이건 일체의 사물과 현상이건 간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작용을 하는 것은 진여가 아닌 여래장, 또는 그것을 심리적 측면에서 규정하여 부르는 이름인 아려야식(아알라야識, 藏識)이다. ‘여래장’이라는 말은 ‘여래를 잠재적인 상태로 감추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며, ‘如來’(타타아가타)는 ‘眞如에서 온 자’ 또는 ‘진여와 하나인 자’를 가리키는 만큼, 여래장은 ‘진여를 감추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래장 또는 아려야식에서 진여(즉,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는 상념(즉,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과 ‘동일하지도 상이하지도 않은 상태로’ 결합되어 있다. ‘동일하지 않은 상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진여와 상념 사이에는 엄연한 개념상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며, ‘상이하지 않은 상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그 개념상의 구분이 아직 사실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려야식은 진여로붙 상념이 생기기 직전의, 말하자면 일촉즉발의 상태로서, ‘중생의 마음’(衆生心)이 상념으로 흐르는가 아니면 절대세계에 머무르는가를 가르는 최초의 분계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규정하자면, 아려야식은 우리의 경험적 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가정되는 최초의 논리적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앞의 ‘직전’이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닌,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직전’을 뜻한다). : p510
진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不生不滅) 데 비하여, 무명은 오직 ‘시작만 없을 뿐’(無始)이며 원칙상 끊어버리거나 없애버릴 수 있다. :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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