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하지만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내야만 하고, 또한 바로 거기에 해답이 있다고 말했다. : p95 

하밀 할아버지는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을 볼 때에 인간미라는 것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우스운 말을 하는 데 대해 나는 덧붙여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미라는 것이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로자 부인이 그 유대인의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때면 나는 인간미가 결코 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큰 책 전체인 것 같고, 그런 책 같은 것은 보고 싶지도 않다. :  p108 

로자 부인이 만일 암캐였다면 사람들은 벌써 그녀를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한테 더 잘해 주기 때문에 사람을 고통 없이 안락사시키는 일은 허용치 않는다. : p119 

나를 신경질나게 만들었던 그 여자는 방 한가운데 안락의자들 전면에 있는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불이 모두 켜지자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 방에는 서너 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무기 같은 것은 들고 있지 않았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내 모습은 아마도 바보 같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도 다 그렇게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금발의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나는 사기가 좀 올라갔다. 내가 그녀한테 조금은 인상적이었나 보다.  

"어머, 내 친구 아냐!" 

우리는 결코 친구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르튀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여자들은 나를 굉장히 웃긴다. 

"이건 뭐니?" 

"낡은 우산에다가 옷을 입힌 거예요." 

"그렇게 옷을 입은 걸 보니 참 재미있구나. 꼭 무슨 마스코드 같아. 이게 네 친구니?" 

"내가 뭐 저능아인지 아세요? 이건 친구가 아니에요. 이건 우산이란 말이에요." 

그녀는 우산을 들어 보는 척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아이를 입양하려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저능아였다. : p124 

그녀는 내게 이 방이 영화 녹음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화면의 사람들은 마치 말하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넣어주는 자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새들과 같았다. 새들은 직접 자기네 목소리를 새끼의 목청 속에다 넣어준다. 처음 했을 때 실패하면, 즉 목소리가 때맞추어 들어가지 않으면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에 멋진 장면이 일어난다. 모두가 다 뒷걸음질하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서는 뒷걸음질해서 사회 속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느 누가 단추를 누르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동차들은 뒤로 굴러가고, 개들은 뒤로 뛰어가고, 산산조각이 났던 짐들이 다시 모아져 대번에 눈앞에서 다시 지어지는 것이다. 시체에서는 총알들이 나와서 기관총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살인자들은 뒤로 물러서서는 창을 통해 뛰어서 물러가 버린다. 그리고 쏟아진 물은 다시 일어나 잔을 다시 채운다. 흐르던 피는 시체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핏자국은 아무 데도 없고 상처는 아문다. 침을 뱉은 사람의 입에는 다시 침이 들어간다. 그것은 정말로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 거지 같은 생애에서 본 것 중 가장 멋진 것이었다. 한순간 나는 젊고 생기 있는 로자 부인의 튼튼한 다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로자 부인을 보다 뒤로 가게 하여 더욱더 예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나왔다. : p125 

금발의 여자가 내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사실대로 고백하면 난 그 여자한테서 아주 따뜻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두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화가 너한테 정말 재미있었나 보구나." 

"아주 재미있어요."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다시 오너라."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래서 뭐라고 약속드릴 수 없네요."  : p129 

로자 부인이 열다섯 살 때에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에 마치 그녀 앞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열다섯 살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해 보면 나는 속상해 배가 다 아팠다. 인생이 그녀를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여러 번 거울 앞에서 만일 인생이 나를 속여먹으면 내가 어떻게 보이게 될까를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잡아당기며 이맛살을 찌푸려보는 것이다. : p140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는 전에는 굉장히 예뻤지요. 아마 할아버지도 결혼했을 거예요. 그래요, 저도 알아요. 지금은 로자 아줌마를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이 사진을 보고 로자 아줌마를 생각하면 되잖아요." 

"모하메드야, 50년 전에 내가 로자 아줌마를 알았다면 아마 아줌마하고 결혼했을 거다." 

"하지만 결혼하고 50년이나 살았다면 할아버지하고 아줌마는 싫증이 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결혼하시면 서로 더 좋아만 하실 거예요. 서로 싫증나게 될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 p147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할아버지에게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또 할아버지에게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 p167 

모모야, 나는 단지 의학이란 것을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정신이 나가곤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혼수 상태로 의학에 공헌하기 위해 몇 년 더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만일 오를레앙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병원에 데려갈 거라는 소문을 들으면 네 친구에게 가서 나한테 주사 한 대를 놔주라고 해라. 그리고 내 시체는 시골에 갖도 버려라.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숲속에다가 버려라.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열흘 동안 시골에 가 있었지. 그렇게 공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도시보다 내 천식에 더 좋단다. 나는 내 엉덩이를 35년 동안이나 손님들한테 주었지만 지금에 와서 또 의사들에게 주고 싶지는 않단다. 약속해 주겠지?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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