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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 질병과 아픔, 이해받지 못하는 불편함에 관하여 ㅣ 그래도봄 플라워 에디션 2
오희승 지음 / 그래도봄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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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파본 사람이 잘 안다고하죠. 네, 바로 제가 그렇습니다. 전 신체의 질병에 관해 저자와 교감이 가능한 책이라 선택했죠. 저와 다른 질병이지만, 교차점이 있는 이<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책은 그녀의 두 가지 질병을 앓게 된 과정을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로 기록해 놓은 에세이입니다.
대체 'CMT(샤리코-마리-투스)'란 병이란 게 뭘까요? 천천히 손이 굽고 마비가 오는 증상이라해요. 선천적으로 유전이 가능한 질병이고 2500명에 1명꼴로 걸린다고하죠. 게다가 그녀는 '관절염'까지 앓는다고했어요.
병이 앓고 있는 과정과 회복되어 가는 사이에 그녀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겉으로 멀쩡해보이는 데 자신의 고통을 보여줄 수 없어서 답답해했고, 저또한 그녀의 그런 심정이 이해가 갔습니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어떤 사람이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질병에 대해, 그것도 두 가지 질병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기증명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겪었을 저자로서는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가족이나 타인에게 자신의 병명과 고통을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하루 이틀의 이벤트가 아니었으니까.
"매일매일 수년간 누적된 시간 속에서 내 고통은 언어를 잃어버렸다. 내가 뱉는 말에 내가 질릴 정도로 반복되는 같은 이야기에는 어느 순간 원망과 짜증, 비난이 섞여 있었다.
이해를 바라며 시작한 말이지만, 상대에게 가닿는 언어는 이미 그 의도와 기능을 잃어버렸다. 언어를 잃어버린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시끄러운 아우성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지긋지긋한 푸념이었을 것이다." (125쪽)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말해왔을 저자를 생각해보노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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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녀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과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병은 현재진행형이고 몸은 노호한다. 언제 다시 고통이 일상이 될지 모른다. 지금의 찰나와 같은 순간이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 구간일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하며 아쉬워하기보다 현재를 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감사하며 살고 싶다" (11쪽)고, 글쓴이는 밝혔습니다.
혹시 또 올지 모르는 아픔에 대비해 현재의 아프지 않은 상태를 감사하게 여기며 사는 게 참 질병을 겪지 않는 사람들에겐 별것 아닌 일로 보여질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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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차의 제목이 와닿았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란 제목에서 저또한 그랬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몸도 안 아프고, 마음도 안 아프고 그런 상태로 지냈더라면 또래들처럼 멋부리고 살빼고 돈도 벌며 친구들과 놀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자유롭게 달리고 싶어했습니다. 사회적인 아름다움과 격식을 갖춘다는 의미에서요. 그녀는 어린시절 고관절 이형성증을 진단받았다가 쉽게 행했던 일상생활을 못하게 됐습니다. 커서는 신경과에 가서 CMT란 진단을 받았고, 또한 관절염까지 앓게 됐죠.
어떤게 고통이 강한지 비교하자면, 둘 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점이 비슷한 듯합니다. 같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끼리 통증의 정도를 비교해봤자, 절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원래 자기 손이 더 아픈법이니까요. 질병은 절대적인 평가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이뤄지는 상태일 뿐이죠.
과연 어디까지 얼마나 아프고 불편해야 장애일까요?
"장애인의 범주에 속하려면 얼마나 아프고 불편해야 할까?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의학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적 비용을 얼마나 치를 의향이 있는지는 사회구성원과 합의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52쪽)
저자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그리 썩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장애인에 해당되는지 해당 공무원이 자신의 집에 와서 테스트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탈락됐죠.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하는 것처럼요. 그녀에게 주는 두 가지 고통은 그녀를 매몰차게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멀쩡하구만'.
병원에선 통증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 표현하라고하죠. 한방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다녀봤거든요. 1은 미미한 수준이고 10은 출산의 고통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전 통증의 객관화가 가능한 일인지 다소 의문스러웠죠.
어떻게 나의 고통을 숫자로 정확히 매겨질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난 똑같이 아파죽겠는데 내가 참으면 5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1도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아예 안 참아도 통증을 객관화 할 수 있나.
그 정도에 따라 치료약이 막 달라지나. 그러면 틀리면 어떻게 되나란 생각이 뒤섞여들게 마련이었죠. 저자는 그런 방식에 아리송하기 이를 데 없는 기준이라 꼬짚습니다.
전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마취과, 한의원까지 여러군데를 다니면서 별별 의사들을 만나봤죠. 친절한 의사도 있었지만 불친절한 의사도 있었죠. 내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는 태도에 더 이상 가기가 싫더라구요. 치료받으려했는데 약만 처방해주고 끝이거나 약도 효과가 없다고 말하고 주사도 받았지만 역시 효과가 없고 아무리 mri찍어도 헛소용이었죠.
저자는 대다수 친절한 의사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었다고합니다. '어떤 의사는 그녀의 질문에 '풋'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고했습니다.
그녀가 '더 기분 나쁜 것은 자기의 질문에 답을 하긴 커녕 마치 들은적도 없단 듯이 질문 자체를 묵살해버렸다는 점'이었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몸에 관해 질문하는 게 왜 조심하고 송구스럽게 여겨야 할 일인가" (63쪽) 이라며 저또한 거기에 공감을 했죠.
그녀가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 또한 입원병동이 갑갑하고 답답했었나봅니다.
저또한 작년에 B형간염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1인 1실 병동에 강제로 입원되어 감옥 같은 생활을 했었죠. 마스크 쓰고 병동 복도에 나가는 게 귀찮고 눈치보여서 식판을 재빨리 배식구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병실 밖으로 나가면 간호사 언니들이 땍땍 잔소리가 날아오는 걸 듣기 싫어서 정말 몸은 약을 먹어서 편해졌지만, 맘은 정말 불편했습니다. 창문밖을 바라다보며 나도 빨리 나가고싶단 생각이 절로 들었죠.
게다가 1인병실이라 거기서 급식도 했으니 부모님의 돈이 무진장 깨졌죠. 이젠 B형 간염 항체가 없어서 예방주사를 맞을 예정입니다. 부스터샷은 이미 맞았으니 그 다음 B형 간염 백신맞겠죠.
또 하나, 제가 어디 아프냐에 답한다면, 오래전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가 있는 편이라고 한의사는 말했었죠. 근데 대학병원의 마취과 선생이 말하길, 제 병은 남들이 30% 고통을 느낄때 전 100% 느낀다고 통증에 과민하단 얘길 했습니다.
디스크 안쪽에 눌린 모양이 아주 작은데 같은 부위를 앓는 환자들 중 고통을 크게 느낄 수 있는 환자도 있단 걸 깨달았죠. 아, 허리디스크쪽이 아픈 건 맞지만, 어떤 사람은 디스크가 터져도 멀쩡하다고했습니다.
근데 전 조금만 상처가 났는데 더 크게 고통을 느낀 쪽이었죠. 그래서 어깨와 허리가 아플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입을 다물고 되었습니다. '나 진짜 아픈데' 어떻게 말로 설명이 안 되니 더하더군요.
나름 스트레칭도 하고 운동도 매일했지만 지치더군요. 스트레칭이라하면 덜 아픈데, 그것마저 안 하니 또 아프고 반복했습니다. 현재는 덜 아플뿐, 아예 안 아픈건 아니에요. 운동엔 소질이 없어서 아무리 아파도 하질 않으니 참 게으런거죠.
"사람들은 대부분 '너보다 더 심한 사람 많아', '누구나 겪는 일이야'하고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야만 고통을 털어놓을 자격이 주어지는가.
얼마만큼의 고통이 진짜 고통이라는 기준은 어디 있는가. 모든 고통은 절대적이고 개별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상대 평가해서 그 강도를 평가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은 온전히 그 사람만이 느끼는 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208-209쪽)
예전에 채팅어플에서 대화한 어떤 남자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매주인가 매일인가 혈액투석을 해야하며 살아가야했고, 저는 허리디스크로 아픔을 참으며 살아가고 있었죠. 그는 이런 질문을 했었죠.
'누가 더 불행한가'라고 전 그에 대한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질 않네요. 그때 그는 저한테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구나란 대답을 했었죠.
근데 그 질문을 돌이켜보니 어차피 둘다 불행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죠. 저자의 그런 생각처럼 누가 더 아픈 게 진짜고 누가 더 아파야 불행한거라고 못을 박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프 건 그 고통은 같습니다. 비교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당연히 본인이 가장 아프고 잘 아는법 이니까요.
그녀가 회복하는 동안 여러일을 겪었는데, 취미 생활을 마음껏 가질 수 없었다고하네요. 요가를 하려해도 의사 선생님이 정해준 운동만 가능하지요, 간병하는 동안 엄마가 해주는 데도 지쳤었고,
남편 또한 지쳐서 그녀의 허락하에 나홀로 해외 여행까지 갔다오고 자기 자식조차 엄마가 밉다며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기해서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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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받아봤을 때, 참 가볍게 느껴졌고, 이쁘게 느껴졌습니다. 연보라색 표지 컬러에 내지도 아주 연한 보라색 계열 색상이었죠. 꽃그림에서 '봄'의 계절이 떠올랐고요.
흰 꽃과 연보라색 표지 컬라는 참 맘에 듭니다. 다만, 줄기의 색상이 형광색 연두느낌이라 그게 좀 튀네요. 내지에는 형광색 연두색이 안 보여서 눈이 피로하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굳이 표지에 형광색 연두색을 썼어야했나싶지만 색이라도 튀어야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네요. 워낙 전 시야가 안 좋아서 표지는 오래 볼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형광색 계열은 눈의 피로감을 증가시켜서. 디자인과 컬러(형광계열색 제외)의 선택은 나름 좋았습니다.
[총평]
그녀가 왜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야만 했었는지 이젠 이해가 갔습니다. 어디 딱 하나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누가 쉽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전 그녀가 겪었던 고통 속 내면의 성찰이 잘 돋보였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CMT를 앓고 있거나 관절염을 앓고 있거나 그 둘다 앓고 있지 않은 분 또는 그런 분들과 가까이 지내는 분이시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어떤 질병에 걸렸든 그 병에 걸린 가까운 사이라면 공감을 많이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신체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내면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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