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후 갬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엊그제만큼 못마땅하지 않다.
상당히 뻔뻔하고, 상당히 게으르고, 상당히 겉과 속이 다르지만.... ... 봐주자.   

오늘 낮, 서너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었다.
어딜 갈까~~~ 생각하다가.... 신탄진 IC 근처 어느 뒷길에 석재 가공하는 곳을 떠올렸다. 
노천에 화강암이나 색색의 돌이 있고
이것을 갖가지 모양의 묘석이나 기념비, 혹은 벽이나 바닥재 용으로 자르고 다듬는 곳이다.

고속도로를 타고 IC를 들어올때 이 앞을 종종 지나면서,
언젠가 구경 가봐야지....  부서진 돌쪼가리도 좀 얻어야지.... 했었는데
오늘, 그곳에 가보자는 생각이 났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걸어 들어갔다.
석재 야적장을 구석구석 구경 했는데, 큰 개만 매여져 있고 녹슬어가는 돌 자르는 기계가 보일 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석재가 쌓인 곳에서 나와 뒷골목 쪽으로 내려가보니 기계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대충 보아도 높이가 3미터는 될  커다란 검은색 장방형 돌에
글자를 새기고 있는 초로의 장인(匠人) 아저씨가 계시다. 
'잠시 구경해도 돼요?'  물으니, 고개만 끄떡이고는 일을 계속 하신다.
기념비를 옆으로 누인 상태에서 작업 중이라, 고개를 옆으로 빼고 내용을 읽어보니
어떤 가문의 내력을 돌에 새겨넣는 것이었다. 무슨성의 무슨 파가 신라시대에는 이랬고.... 고려시대에는 이랬고... 무슨 파는 어떻게 갈라졌고..... 몇대손 누구누구는 어떻게 훌륭한 일을 했고.... 이런 이야기.
이야기 분량으로 보아하니, 이렇게 큰 기념비라도 세 면은 빼곡하게 채워야 할 듯 하다. 

그런데, 기념비보다 그분이 사용하는 기구가 더 신기했다.
모터로 공기탱크를 채워서, 그 압력으로 돌을 연마하는 기구인 것 같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드릴이 수평으로 회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앞뒤로 날을 움직여서 돌을 빠른 속도로 쪼는 원리이다. 목공 선생님 작업실에도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타커가 있는데, 돌 쪼는 곳에도 응용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차 잘못하면 엉뚱한 곳을 쪼개 되어 그 큰 돌에 해온 작업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다.
장인이 대단한 집중력으로 오차 없이 해나가는 모습을 한참... 보았다.


이곳에는 돌을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자를 때 나온 파편이나 자투리가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다.
그 돌 몇 개 들고와서 무언가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공구는 없지만, 내게는 망치와 얼마 전에 1500원 주고 산 정(釘)이 있지 않은가!
선사시대 암벽화도 저런 기계 없이 만들어졌을텐데, 뭐.


어떤 돌을 가져가서 무얼 만들까... 생각하면서 바닥을 살피는데, 
내가 또 욕심을 앞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무얼 만들지 정하고 나서 그에 맞는 돌을 고르러 다시 와야 할지,  아니면
우선 가져가서 앞에 놓고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돌과 눈(目)싸움을 하는게 나을지 고민했다.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걸 쓸데 없는 소유욕으로 쟁여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내가 지금 그냥 가면 언제 이곳에 또 오겠어?" 라는 대단한 핑계를 생각해내고는
그곳에선 재사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돌 몇 개를 굴러다니는 양동이에 담아서 장인 아저씨에게 들고 갔다.

" 저, 이거 가져가도 되나요?"  
장인 아저씨는 흘끔 양동이에 담긴 돌들을 쳐다보더니, " 뭐에 쓰게?" 묻는다.
뭘 만든다고 하기는 챙피해서 "그냥 집에 두게요."  .... 멋적게.... 미소 작전.    
아저씨는 가져가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 얼마 드리면 될까요?" 
" 그냥 가져 가."
와~~    횡재했다~~~! 

그 돌을 약 30미터 떨어진 차까지 가져오는 데,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다! 
채석장에 아무도 없어도 되는 이유를 알겠다.

집에 와서 돌에 묻은 진흙을 씻어냈다.  씻으면서 행복한 궁리.....
이건 연필꽂이 만들까?  이건 화분?  이건 반반하니까 문양을 새겨볼까?
이건 더 작으니까 도장을 파볼까? 글씨가 새겨지려나?
아니면..... 백제금동대향로의 인물들을 체스판의 말처럼 따로따로 새겨볼까? 

내일부터 행복한 눈싸움을 할 것 같다. 
물론..... 궁리하는 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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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2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하루 셨을 것 같아요. ^-^ 멋진 작업이 될 것 같네요. 사진좀 올려주세요.

마냐 2005-08-2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사추기는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군요. 행복한 눈싸움을 하면서, 새로운 의욕을 만나면서, 신이 난 가을산언니의 모습이 반갑습니다.
사실, 사추기 타령하시는 모습도 너무나 인간적이라 반가웠고, 적응장애 운운하실땐,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구나 싶어 더 반가웠슴다. 에헤...한꺼번에 댓글을 해치우다니..ㅋㅋㅋ

가을산 2005-08-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 네, 기분전환 되었어요. 사진이라 하시니, 사진기를 가져가서 그곳 사진 몇장 찍어오지 않은 게 아쉬워지네요. 쫌만 기다려 보세요. 제 전리품 사진 찍어 올릴게요. ^^

마냐님/ 오오~~ 반가워라!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헤헤..... 사추기는 이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나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