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이었던 22일 저녁 대전역 광장에서 노숙인을 위한 추모제가 있었다.

2년 전, 한 노숙인이 사망한지 몇일이 지나서야 발견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행사인데, 그간 서울에서만 진행된 행사를 금년에는 대전서도 준비했다. 집계해보니 지난 3년간 길거리에서, 쪽방에서, 그리고 행려병자로 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이 대전서만 모두 24명이나 되었다.

역전에서 이들과 함께 살면서 상담, 배식, 쉼터 제공, 진료 등을 해오던 여러 단체 사람들, 그리고 쉼터에 입소한 분들까지 함께 이 행사를 준비했다. 학생 노래패는 무보수로 노래를 불러주었고, 한 식당에서는 식이 끝나고 나눌 200인분의 팥죽을 기증해 주었다. 쉼터의 아저씨들은 작은 분향대와 컵에 담긴 초를 손수 만들었다.


행사를 한창 진행하던 중, 어떤 사람이(이 지역의 양아치중 한명) 진행자들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야 이곳에 늘 있었고, 이날도 어느정도 실갱이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니네들 다 돈 보고 이러는 거 안다. 자기돈은 딴주머니 차고 있을거다. 자기 자식들은 아파트까지 다 사주고 있을거다.' '니네가 이사람들에 대해 뭘알아!' '니네 부모형제가 죽었어도 차가운 길바닥에서 이러겠냐?' 등등..

모두들 갑자기 주목한다. 지난 3년간 쪽방지역의 진료센터에서 일해온 김간사가 이 사람을 말리고 식은 무사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생각거리는 이제부터다.

* 김간사, 열받다.

행사장 한쪽 구석에서 실랑이 하던 김간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아저씨! 이쪽으로 와! 이리와서 나랑 얘기해요!' 하며 광장의 변두리로 그 아저씨를 잡아 끈다.

-- 대전의 노숙자 쉼터 담당인 원목사는 스테파노 수사님과 달리 괄괄하다. 가끔씩 맞고함을 치기도 한다. 원목사나 이목사 같은 분들은 IMF 당시 2개월간 직접 노숙을 하기도 했다. 이곳의 상근자들은 늘 취하고 거친 이들을 상대해와서 평소에는 조용조용하지만, 필요할 때는 한끝발씩 한다. 여기서 원 목사만 남자지, 이 목사, 김 간사, 이*영 간사 모두 여자다. 물론 훌륭한 남자 간사들도 있었는데, 이들만큼 오래 버틴 사람들은 없다.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들도 번쩍번쩍 안아올린다. 누가 여자를 약하다 하는가?


* 아저씨가 소리친 이유

 

이분은 알고보니 고아출신이었다. 참가한 학생 한명이 행사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열받았던 것이다. 다음은 아저씨의 말.


'나 고아출신이야. 나 사진 신물나게 많이 찍었어! 손님 오는 날엔 원생들이 동원되어 청소하고, 새옷 꺼내 입고, 과자박스, 자전거 앞에 두고 사진 신물나게 찍었어. 그런데 다음날 보면 그 박스, 그 선물들 다 없어졌어. 원장이 다 착복한거야. 너희도 이거 사진찍어서 교회같은 데 대문짝만하게 붙여놓고 돈이나 얻으려는거 아니냐?" “후원이나 지원금을 바라고 하는 헛껍데기 행사는 집어쳐라.”

“니들이 고아가 되어본 적이 있느냐? 니들이 노숙을 해 본 적이 있느냐? 니들이 이사람들 심정을 어떻게 아느냐?”

이분은 어려서부터 전시성 행사, 사진찍기 위한 행사, 위선적인 선행등을 신물나게 겪어왔던 것이다.


* 그래도 좀 봐주라

 

- 우리가 대전역 광장에서 행사를 한 것은 노숙인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있는 이곳에서 한 것이다. 저 사람들을 보라. 저사람들이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느냐?

 

- 후원을 바라서 하는 행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 이들의 죽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관심과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면은 있다.

 

- 사진을 찍은 것은 학생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지,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 아까 열낸 김간사는 이들과 3년간 동고동락 했었다. 이사람들을 모르면 이 근방에서 지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아까 부모형제라면... 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부모 형제마저 외면한 자들을 수발들고 있다.

 

- 난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들이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나부터도 함께하지 않는다. (교회 안다니는 것이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이다니! --;; )

 

- 내년에 행사를 준비할 때는 아저씨의 지적을 반영해서 대외적인 내용보다 좀더 당사자들 입장에서 내실있는 행사가 되도록 하겠다. (실재로, 이날 불러진 노래들은 너무 '고상해서' 노숙인들이 따라부르기 어려운 노래들이었다. 내년엔 노래방 기기라도 빌려 아저씨들이 마음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라도 싫컷 부를 수 있게 해볼까 한다.)

 

- 처음부터 제대로 봉사하는 것은 힘들다. 오늘 처음 무보수로 노래해준 학생들도, 온지 몇일 되지 않은 이*행 간사도, 행사 내용에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한 우리도 완벽하지는 못하다. 당연히 노숙자들을 당사자들만큼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한걸음씩 서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어설프더라도 실수가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쪽도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좀 봐주라.


* 새 간사

 

김 간사가 지난 달 직장을 옮긴 후, 후임을 물색했는데, 일이 거칠고 주로 밤시간에 일해야 하는 것 때문에 지원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자가 지원을 해왔다.

두손들어 환영해도 모자를텐데 면접때 원목사님의 ‘왜 여기에 오려고 지원했나?’라는 질문에 ‘이론, 이상과 삶을 일치시켜보기 위해’라고 대답했다고 그만 원목사님이 퇴짜를 놓고 말았다.  --;;

몇일 후 다시 찾아와서 이번에는 ‘그냥 열심히 부딪혀 보겠다’고 했고, 이렇게 해서 이*행 간사는 진료센터의 새로운 간사가 되었다. 

 

이 간사,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났다는데..... 남자가 눈물났다는 것도 그렇고.... 눈물난 걸 내게 말하는 순진한.....  이 험난한 곳에서 얼마나 버틸지? 이간사 파이팅!


* 활동가

 

요즘은 간사를 활동가로 고쳐부른다. 나는 진지한 고민과 함께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존경한다. 아직 그들이 더 젊고, 경험이 적고, 생각이 짧더라도.

가진 시간과 재물을 전혀 나누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나 시간과 관심의 아주 일부만을 나누는 '독지가' 혹은 '지원자'들에 비해, 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거의 모두 쏟아붇는다. 현장에선 가장 궂은 일들을 맡아 하면서도 가끔 얼굴을 내미는 '회원'이나 ‘지원자’들을 오히려 반가와하고 고마워한다. 이들의 열정이 없으면 많은 운동들이나 ‘꿈’은 그야말로 ‘몽상’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활동가로 그들의 꿈에 대한 첫 실험을 한다. 이들이 실험에서 너무 큰 상처를 받지 않기를, 너무 큰 희생을 강요받지 않고 꿈의 실현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서명

 

행사 한쪽에서는 노숙자들의 주거권을 청원하기 위한 서명을 받았다. 참가자나 행인들 외에 당사자들의 서명도 받았다.

그런데 또하나의 문제.

많은 분들이 한글로 이름과 주소를 적을 줄을 모른다. 눈이 나빠 적을 수 없다고도 한다. 한글을 안다 하더라도 주소난에 적을 주소가 없다!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은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아니다.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 25번째?

 

추모제를 하는 중에도 광장 한쪽에선 노숙자 중에 머리를 다친 사람이 발생, 구급차가 왔다.(참 세상 좋아졌다!)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의식이 혼미해서(다쳐서? 아니면 술취해서?) 응급실로 실어갔다. 그가 25번째 사람은 되지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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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3-12-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살다보니 이곳을 빼먹었군요...일상과 생각이라는 타이틀을 왜? 그냥 지나쳤었는지...저 자신이 이해가 안되니 가을산님도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죠? 이제는 늘상 들러서 일상을 늘 점검하고 가겠습니다...

sooninara 2003-12-3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는 말이 있죠..성장기에는 나누기보다는 파이를 키우기위해서..
지금같은 불황에는 나살기에도 바빠서... 선진국이라는 이름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름만 선진이라고 하지말고 실천이 뒤따르는 나라가 되려면 얼마나 지나야할지...
애쓰시는 여러분..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