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희망진료센터의 진료당번이었다.
상근 간호사와 환자들이 오랜만이라 인사한다.  
요즘은 진료 봉사를 하는 의사들이 늘어서 한달에 한번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분명 좋은 일이다.

2. 늘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요즘 경기가 어려운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진료센터는 원칙이 의료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센터 주위의 주민 중 의료보험이나 기초생활보호대상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급적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의료기관을 이용하도록 권한다.
그런데, 요즘은 의료보험이 있다가도 보험료를 납부 못해서 자격이 상실된 사람들도 늘고 있고,
설사 보험증이 있어도 대부분 혼자 사는 쪽방 노인들이라 혈압약값 한달 1만원이 아쉬운 사람들이 많다.

어제도 한 할머니를 미안하게 보내야 했다.
보험증이 있어 혈압약은 동네 병원에서 타서 잡수시는데, 관절염 약을 진료센터에서 타오시던 분이다.
진찰을 하고는, 할머니가 "이번에는 약 한달분을 줘요."  한다.
"왜 그렇게 많이요?" 물었다.
"접수하는 아가씨가 보험이 되는 사람들은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고 해서 이제 미안해서 못오겠어. "
" 할머니, 내과에서도 혈압약과 함께 관절약도 처방 받을 수 있어요. 그러면 진료비를 아낄 수 있지 않나요?"
" 그거야 알지. 그런데 혈압약값만 해도 만원이 넘는데, 관절약까지 하면 돈이 모자라. 형편이 빤한거 아니유? "
할 말이 없었다.

차트에다가 다음에 접수하는 사람이 볼 수 있게 할머니 말씀을 적어넣었다. 
약은 한 달분 처방했다.
할머니에겐 '다음에 오셔도 되도록 여기에 적어 놓았어요'하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가 다시 오실지는 미지수다.

3. 어제 진료를 끝내고 같이 수고한 사람들과 벧엘의 집 목사님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벧엘의집은 감리교회 재단 소속의 노숙자 쉼터이고, 진료센터는 형식상 벧엘의집 소속으로 되어 있다. 목사님은 벧엘의집을 세우기 전서부터 노숙자들과 지냈던 분이다. )
목사님이 어째 힘이 없다.  요즘은 전에 없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도 않고, 평생 처음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단다. 
벧엘의집에 후원금이 줄고 있다. 개인 후원자들도 어렵고, 그간에 후원해주던 교회들도 어렵다고 한다. 상근자들 월급도 겨우 주고 있고, 한달에 100여만원 드는 진료소 약값도 부담이다.
이런 마당에 '복지시설의 시설기준'을 맞추어서 등록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 세들어 있는 곳에서 나와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한다.  ---- 그러나 그러려면 돈이 '수억' 든다는데.....  대책이 없다.
그래도 목사님과 사모님, 웃으신다.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4. 글리벡 공대위라는 단체에서 내년 초에 국제 모임을 준비하려고 한다.
(글리벡 공대위는 2001년에 글리벡이라는 백혈병 치료제의 약값 인하와 보험확대를 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백혈병 환자들과 몇몇 의료단체 등의 연합체였다.)
한국에서 환자들의 요구로 보험이 확대되고, 인도에서 Veenat이라는 글리벡의 카피약을 수입하는 활동 등이 알려지자, 외국 여러 나라의 백혈병 환자들이 Veenat을 구하는 방법 등을 문의해 오면서,
각국의 의료제도, 약가 결정 과정, 특허제도, 의약품 수입제도 등 복잡한 내용이 많아서 인터넷이나 이메일만으로는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어서 내년 초에 한번 모여보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 회의에서 이 모임의 예산을 대략 1000만원으로 잡았다. (일부 가난한 나라의 환자 대표들은 비행기값과 체제비를 제공해야만 올 수 있다.)  문제는 이 돈을 어떻게 구할 것이냐가 문제다.  어떻게 하면 스폰서를 구할 것이냐?

국제 모임의 예산이 '겨우' 천만원?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민이라고?  언듯 생각했다가....
'겨우'라고?    그렇지.  나도 '겨우'   몇천만원 마이너스인데.  웃었다.
또 계산해 보았다.  천만원이면..... 글리벡 700알정도만 팔면 될 돈이다.  환자 한명이 삼개월 먹을 약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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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9-12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또가 되면...할 일이 많군...이라 생각했더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있을텐데 말임다.
이 나라엔 '눈먼 돈'도 많던데 1000만원 예산이 무지 커보입니다...쩝.

비로그인 2004-09-1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가을산 2004-09-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럴 때는 부~~자 되고 싶다니까요. --;;
로또도 동료 선생님들과 만원어치씩 한번 사봤는데, 그 많은 번호 중 단 한개도 안맞더라구요.

찬타 2004-09-1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으루 가을산님이 무슨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알았네... 세상엔 참 소중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았네... 글구 천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도..... 알았네... 갑자기 쬐끔 슬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