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심상이최고야 >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

 전체조회가 있었다. 삼월이라 전체조회도 잦다. 개학식, 입학식 그리고 매달 있는 정기적인 전체조회... 빼곡히 아이들을 강당으로 밀어넣고 발표를 한다. 일학년 일반 반장 누구, 이반 반장 누구, 삼반....십반 반장 누구// 이학년 일반 반장 누구, 이반 반장 누구....//삼학년 일반 반장 누구, ...십반 반장 누구....//일학년 일반 부반장 누구, 이반 부반장 누구......삼학년 십반 부반장 누구.// 이어서 간부 수련회 표창장 누구누구, 이어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우리 학교만의 독특한 '나의 다짐' 복창, 교가 제창, 학생부장 선생님의 엄포, 훈계... 

 2교시 때였다. 고3 수업인데, 그 친구들은 입학할 때 부터 봐서 이름을 다 부를 수 있다. '반갑습니다~. 주말 잘 보냈습니까?' 함께 인사를 하고 나서 보니 빵을 급하게 먹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이분단 저 끝에서도 누군가 빵을 급하게 먹고 있다. 평상시 같으면 어떻게 선생님이 들어왔는데도 빵을 버젓이 먹고 있느냐고 화가 났겠지만 그 빵을 허겁지겁 나의 눈치를 보며 먹는 모습에 눈물이 나려 했다. 안쓰러웠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지금 배고픕니까? 아침은 먹고 옵니까?' 그러니 학교에 일곱시 십오분까지 오느라 잘 먹지 못하고 더군다나 오늘 아침에는 전체조회까지 있어서 매점 갈 시간도 없었단다. 교실이 조용해 졌다. 내가 화를 낼 것인지 짐짓 눈치를 본다. '아이들아~ 이건 선생님이 화를 낼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쉬는 시간 십분동안 화장실 갔다오랴 책 챙기랴 매점가서 빵 사오랴... 막상 종이 쳐서 물도 없이 허겁지겁 빵을 먹는 모습에 어느 누가 너희를 나무라겠니!!' 서른 여덟개의 우유를 매점에서 사왔다. 그리고  함께 마셨다. 

 5교시 때였다. 점심 시간 오십분은 너무 짧다. 배식이 늦어지는 날이면 점심 먹고 십분쯤 뒤에 종이 치기 일쑤다. 오늘도 그랬나 보다. 5교시가 늘 그러하듯 수업 시작한지 삼십분이 지나자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 과감히 십분을 짤라서 낮잠을 자게 했다. 고른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의 7교시 때였다. 이 모습은 도저히 2004년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 70, 80년대 독재정권 하에서나 있을법한 풍경인데 오늘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이름하여 ' 생/활/검/열/ '. 
 내용은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두발, 손톱, 장신구, 용의 복장검사. 
 '여학생들, 머리 끈 풀어!' 어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아이들이 일제히 머리 끈을 푼다. 바람에 펄럭이는 머리카락....(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위협을 주는 용이라며 가위까지 들고 나왔었다.) 
 '담임 선생님들은 머리카락 긴 여학생들, 기타 생활검열 내용에 해당되는 학생들 뒤로 불러 세워주세요.'

 동참할 수 없었다. 동참이라니.. 운동장을 벗어나고픈 생각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머리카락이 조금 길다 싶은 아이들이 우루루 뒤로 불러 세워졌다. 주말에 잘라서 머리카락이 짧다고 어느 학생이 주장하자 폭력적인 말로 무마한다. '너는 감히 선생님이 머리카락이 길다고 하면 긴 줄 알지 어디 대들어!' 그리고 출석부로 때린다. 파마를 하지 않았는데 파마를 했다는 이유로 뒤로 불리게 된 어떤 아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눈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이번엔 또 뭔가. 운동화의 끈 색깔이 초록색이라서 불려 나온다. 옆의 아이는 체크무니 운동화라서 불려 나온다.

 끔찍하다. 똑같은 교복에 신발에 머리카락 길이에 양말에.... 도대체 왜들 똑같게 만들지 못해서 안달하는 걸까!

 오늘 7교시에 있었던 생활검열은 엄연한 인권침해다솔직히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부끄럽다. 왜냐하면 오늘 그 자리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 있었지만 막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해버렸다. 부끄러움의 연속이다. 제대로 논쟁 조차 펴 보지도 않고, 싸움 한 번 해보지도 않고, 도전해보지도 않고, 피할 생각을 하다니.... 오늘은 이래저래 숙제가 많이 주어진 날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가 무겁다. 이 숙제들을 어떻게 하면 잘 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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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3-2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니던 시절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런 생활검열이 있나요? 양심적인 교사의 무력한 일기군요...

가을산 2004-03-2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교부터 특목교를 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분위기가 무서워서였습니다.
그땐 무척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었는데, 초등학교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 본 바로 옆의 여자 중학교 운동장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체육시간에 기합받는 것, 업드려 뻗쳐, 오리걸음걷기...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체력장 준비였던 것 같은데, 매달리다가 탈락한 사람에 대한 체벌... 등...
하나같이 귀밑 1cm로 자른 머리를 하고 그러고 있는 여학생들의 처지가 내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는 다행히 체벌은 없는 학교였는데, 복장 검열을 꼼곰히 하는 교감선생님은 물이 담긴 스프레이통을 들고 다니면서 의심이 가는 학생들 머리에 물을 뿌려서 확인하곤 하셨습니다. 이정도는 애교스럽죠? (파마머리인 경우 물에 젖으면 더 꼬불꼬불해진다나..)

심상님과 심상님 같은 선생님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