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행의 유혹  

직장과 담을 맞댄 집 마당에는 커다란 은행이 여러 그루 심겨져 있다.  
4층 높이의 직장 건물보다도 더 키가 큰 은행나무는 담장을 따라 일열로 늘어서 있다.  
봄, 여름이면 싱그러운 잎으로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고, 늦가을이면 노란 잎을 눈처럼 내려 주는데,  
그 모습이 내 사무실의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가득 눈에 들어온다. 장관이다.
이 은행나무만으로도 직장을 옮긴 보람이 있다고 할 정도로 참 잘 생긴 모습이다.  

요즘 은행 열매가 한창 떨어지고 있다. 
뒷집에는 작년부터 아무도 살지 않고 있어서, 은행은 그야말로 '줍는 게 임자'이다.  
그런데 은행이 어찌나 많이 열리는지, 동네 사람들, 직장 동료들, 나까지 원없이 주웠는데 오늘 나와보니  
마당 가득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또 떨어져 있다.  

은행을 주으면, 그 뒷감당이 더 큰 문제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겉껍질, 그것을 벗겨서 씻어서 말릴 때까지 꼬랑꼬랑한 냄새가 감돈다.  
말리고 나면 딱딱한 껍질을 깨뜨려서 알맹이를 꺼내야 하고,
그 알맹를 싸고 있는 얇은 껍질은 은행을 후라이팬에 구우면서 후후 불어서 벗겨내야 한다.  

오늘, 여느때 같으면 근무를 안하는 빨간 날이다.  
신종 플루 덕에 명절에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환자도 뜸하고 주위가 조용하니, 바람 따라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더 잘 들려서 위안이 되어 주고 있다.

오늘은 유난히 은행이 많이 떨어진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후두둑, 후두둑, 마치 우박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좀 데려가 줘~~ 유혹한다.
이미 A4 용지 담는 박스로 두 박스어치나 은행을 주웠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넘어간다. 
집게와 비닐봉지를 들고 뒷마당으로 나간다.
장갑낀 손으로 주우면 훨씬 더 많이 더 쉽게 주울 수 있는데, 많이 주워도 그것을 다 손질할 수가 없다.
그냥, 섭섭하지 않을정도로.... 비닐봉다리 하나 어치만 주워서 들어왔다.  

이 지역 재개발 소식이 솔솔 들려오는데... 이 나무들만큼은 재개발 후에도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도시에서 이정도 잘 생긴 은행 보기가 쉽지 않은데....

* 은행을 구울 때마다 껍질 벗기기가 귀찮다면...
 1. 딱딱한 껍질을 깬 후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뚜껑을 꼭 덮어서 (밀봉은 시키지 말것. 은행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임)
    전자렌지에 돌린다. 익은 은행알을 이쑤시게나 작은 포크로 꺼내 먹는다. 소금 찍는 것은 선택.

 2. 딱딱한 껍질을 벗긴 은행을 찜통에 살짝 찐다. 
    찐 온기가 조금 남아 있을 때, 과도로 속껍질을 살살 벗겨낸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TV 시청하거나 이웃과 수다 떨면서 하면 못할 정도는 아니다. 
    냉동실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후라이팬에 볶아낸다.
    밥할 때 콩 대신에 은행을 한줌씩 넣어도 좋다.  
   


2. 개과천선  

불량환자가 말을 안듣다가 증상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비인후과 샘을 다시 찾아갔다.
진정제를 임의로 빼고 먹었고, 이뇨제를 먹으면 번거로우니, 혹시 다른 치료법은 없는지 물었다가 야단 맞았다.  
"아니, 조금 안다고 그렇게 맘대로 하면 안된다는 거 잘 알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의사라고 해도, 결국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같은 단계를 밟아가는 것 같다.
부정(아니, 그 병이 아닐거야) - 타협 (의사 처방 말고 요렇게 해보아도 되지 않을까?) - 수긍(별수 없네. 말 잘 들어야지.)
심각한 병은 아니니까 나머지 두 단계(분노, 우울)는 생략.  
 

3. 명절 잘 보내세요.  

결혼하고 나서 두번째 십년이 지나니 이제는 명절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많이 덜어진 것 같다.
이것을 좋게 말하면 '달관'했다고 할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길들여 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 시집 왔을 때, 그 많은 일에 놀랐던 내가 이제는 그중 무얼 빼자면 서운한 맘이 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금년에는 송편을 빚지 않기로 했다. 플루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유성 장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할머니들 앞에 놓여 있는 솔잎을 애써 외면한다.
내년을 기약하면서.  


추기. 근무 끝나고 집에 오니 이번에는 작은 놈이 앓아 누워 있다.  
        이틀 전부터 콧물, 기침이 있더니, 오늘 오후부터 열이 났단다. 39도.
        약을 먹였는데, 그 약까지 다 토했다.  에휴.... 이런 유행은 따라하지 않아도 되는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aviana 2009-10-0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아드님이 빨리 나으셔서 즐거운 추석명절이 되야 할텐데요.
참 B군 책은 두루두루 칭찬이 많네요. 좋으시겠어요.^^

가을산 2009-10-02 23:46   좋아요 0 | URL
네.. 그러게요.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나서 일요일에 당일치기로 서울의 시댁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것도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글고 B군 책 ... 좋아하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험험... ^^

paviana님도 건강 조심하시구요, 명절 잘 보내세요.

Joule 2009-10-06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B군 책 맞춤법이 너무 엉망이어서 걱정스럽더라구요. 그래도 한국 자랑 한 번 해보겠다고 만든 책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유산인 한글 맞춤법이 그렇게 눈에 도드라질 정도로 엉망이어서야.

가을산 2009-10-06 18:42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잘 읽어 보아야겠네요.
난 뭐하느라 B군 책도 제대로 정독을 못하는지...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