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2003-11-02  

주말의 수확
어제 회의는 예상대로 밤샘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꿈돌이 동산(대전의 놀이공원)에 가겠다는데, 밤샘하고 나서 어지럽게 탈 것을 타는 것도, 오래 걷는 것도 엄두가 안나서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고 저는 집에 남았습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생각을 해보니
주말에 아이들도 없고, 남편도 없고, 학회도 없고, 다른 볼일도 없는,
100% 나만의 시간이 도대체 얼마만이었던가!!!
게다가 날씨는 맑으면서 푸근할거라 예보되었는데!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집에서 누워서 보낼 수는 없지 않나요?!!

일단 집을 나섰습니다.
처음 생각은 어디 단풍든 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음식점이라도 가서 경치도 보고 책도 읽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도대체 '전망이 좋은 음식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는겁니다.
계획을 수정해서 가까운 계룡산이 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경치를 보면서 책을 읽기로 하고, 수퍼에서 점심 대신 먹을 과자와 음료를 사들고 계룡산을 향했습니다.

계룡산의 동학사로 갈라지는 길에 이르르니 단풍철에 관광객이 많아서 동학사 쪽에는 계획했던 대로 '전망이 좋은 조용한 길가'라는 곳이 사실상 찾기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는 너무 서운하잖아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전에 몇번 아이들과 함께 간 그 근방의 도예촌이었습니다.
늘 아이들 만드는 것을 도와주느라, 그리고, 애들은 지루함을 금방 느껴서 차분하게 만들어보지 못했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도예촌에 도착해서 도예체험교실을 한다는 푯말이 있는 아무 공방이나 들어갔습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없더라구요! (드디어 호젓하게! ^^ ). 주인에게 찰흙을 받아서 머그잔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주인이 외출할 일이 있다고 잠간 가게를 지켜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할 일은 머그잔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작업실과 전시실을 구경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가, 단지 주인을 찾으면 잠시 외출했다고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주인이 가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도예촌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겁니다. 그중에는 저처럼 그릇을 만들겠다고 주인을 찾는 사람들이 몇 팀 있었습니다. (체험교실을 미리 알고 온 사람도 있고, 즉석에서 하려는 사람 도 있었습니다.) 주인 오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제가 작업대 한쪽에 있는 큰 찰흙 덩어리를 알려주어 각자 자기 쓸만큼씩을 떼어내어 작업대 하나씩 차지하고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만드는 팀이 저말고도 세 팀이었습니다.

저는 머그잔 두개와 냄비 받침대 한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또다른 사람들도 도자기 만들기에 합류해서 어느덧 야외작업장이 거의 꽉 찼습니다. 크크.. 그중에 이제 겨우 네번째 도예 체험을 하는 제게 머그잔 만드는 법을 묻는 사람들도 생겨났답니다. ^^v

다 만들고 계산을 하려고 하니, 주인이 돈을 안받겠대요 글쎄!!
원래대로 하면 삼만원을 받는건데...

오늘, 몸은 피곤했지만,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도 갖고,
도자기도 세개나 공짜로 만드는, 참 운 좋은 날이었습니다.
 
 
sooninara 2003-11-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주말이군요^^
우리아이들은 도자기 만드는것 보더니 숨쉬는 항아리라고 하더군요(솔거나라책중에서..)

ceylontea 2003-11-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값진 주말을 보내셨네요..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가 봅니다...
저 같으면 그냥 집에서 뒤비져 자다가 깨서 커피 마시다 책본다고 하다 다시 자다가 했을텐데...
집을 나서서 도예촌 주인장 노릇도 좀 하시고 도자기까지 만들고 오시다니.. 그 부지런함에 존경스럽습니다..

가을산 2003-11-0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소에는 실론티님처럼 집에서 뒹구는 편인데, 어제는 좋은 일이 있으려고 '필'이 왔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