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20241231일에 돌아가셨다.

12월 초 고관절 골절로 입원했다. 의사들은 담당과에 따라 진단이 달랐다. 정형외과에서는 뼈가 부러진 게 아니고 벌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뼈를 붙이기만 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호흡기내과에서는 한쪽 폐가 거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폐렴까지 앓고 있어 꼭 수술을 해야겠냐고 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뼈가 붙을 때까지 누워있어야 한다. 구십이 넘은 노인이 움직이지 못하면 근육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폐도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전혀 죽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염려대로 아버지의 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당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했던 듯하다.

 

아버지는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허황한 꿈을 꾸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부지런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당신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까지는. 나이에는 장사가 없다고 노화는 아버지의 행동반경을 집안으로 좁혔다.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수렴하면서 소화불량, 변비, 수면장애 호소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고자하는 의지만 충만한 노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싫어했고, 언젠가는 죽을거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가쁜 숨을 쉬는 아버지를 보며 이제는 죽음을 받아들이셨을까 아니면 의식을 잃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아버지는 큰 산이나 든든한 바위처럼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항상 내가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모범이었기에 늙은 아버지의 조바심과 강박, 억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잠깐, 1~2년 정도였음에도 그랬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으로 감옥을 드나들고 늘 감시하는 형사가 따라 붙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언제 어디서나 민중 운운하는근엄하고 진지하지만 정작 노동과는 친하지 않아 늘 궁핍하고 아내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라면?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61


빨갱이의 딸로 사는 것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식구들 일년 먹고 살 농사는 내팽개치고 동네사람 뒤치다꺼리하며 동네 머슴을 자처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지 못할망정 그런 사실에 대해 미안해하기는커녕 빚보증을 당당하게 대물림하는 아버지라니. 신념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자기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어서 당하는 사람의 상황은 무시되기 일쑤다.


아버지는 낫을 휘둘러서는 아니 되었다. 밥값을 하라고 해서도 아니 되었다. 아버지가 해야 했던 것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진정한 사과였다. -187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나누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분리되고 만다. 결국은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알게 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 소설은 아버지가 죽었다’, 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문장사이에는 정말 많은, 아버지의 생애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식이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자식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소설 속 아버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 유물론자로 자신의 신념을 어떠한 의심이나 후회 없이 지켰다. 그 살아온 세월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어제까지 이야기하고 같이 먹고 자던 동지들이 오늘 시체가 되어 뒹구는 처참한 상황을. 그런 일을 겪고도 증오나 폭력이 아닌 포용과 헌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 -179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는 한탄을 부러움으로 시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의 부모는 그 마음을 마음 깊이 새겼을 것 같다. 그래서 힘에 부치고 늘 손해만 보면서도 친척의,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도와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진짜 혁명은 전쟁과 총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힘과 능력을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 돈이나 실력이 아닌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는 것이 진짜 성공한 혁명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아리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회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또 죽음으로 자식과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었으니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226

 

늙은 내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평생 쌓아온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노화의 한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은 늘 살얼음판이었고 아버지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가장 절실했다. 그래서 항상 원칙을 지키고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의 삶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를 거둬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으로 아버지를 더 깊게 이해하고 늙음에 대해,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처음 읽었을 때 내 아버지는 살아계셨지만 지금은 안 계신다. 다시 읽은 소설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드러내놓고 다정함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자식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아버지. 끝까지 삶을 사랑하고 남겨진 아내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았던 아버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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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어머니는 나에게 마음뿐만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법을, 어떤 것들은 아무리 숱하게 감추려 해도 정말로 실재함을 내 온 존재와 함께 주장하는법을 가르치셨다. 나는 내 가족사에서 발설할 수 없는 것을 목격하면서 모든 해체 행위 이면에는, 
모든 끔찍하고 폭력적인 상황 이면에는 여전히 
보듬을 가치가 있는 생명의 숨결이 있음을 보는 법을
 배웠다. 이는 부모님이 나에게 남긴 유산이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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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다가 띠지를 모아놓은 봉투를 발견했다.

책의 아래쪽을 감싸는 띠지는 책을 읽을 때는 불편해서 따로 빼놓는데 다시 끼워두지 않았나보다. 띠지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바코드를 읽어야했다.몇 권은 팔아버렸는지 보이지 않아 띠지도 버려야했지만 대부분은 남아있어서 다시  끼워두었다. 그러면서 보니 읽지 않고 꽂아둔 책이 참 많다.


샀던 시기에 읽어야했던 책들이 많다는 것은 내가 그 나이때 필요한 책을 잘 산다는 것이고, 이제는 읽어 무엇하리 생각하게 된 책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겠지. 사정이 생겨서 모아놓은 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가 요즘 걱정거리 중 하나다. 그러면서도 계속 책을 사고, 쌓아두기만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나이와 신체적 취약성이 형틀, 사슬, '감옥'을 구성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미약하다해도 그것들은 운명으로부터 탈주할 힘, 거기서 벗어날 힘이었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린다. 의지는 있지만, 권력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할 수 없기에,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29쪽


원치 않지만 타의로(자식들의 의지로) 요양시설에 가게 된 어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디디에 에리봉은 어머니의 절망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어머니의 절망과 같지 않다. 같을 수가 없지. 요양원에서의 삶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읽는 것이 고통스럽다. 자율성의 상실은 노인의 욕망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만든다.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요양원 안에서도 개인의 삶이나 욕구가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는다. 각자의 성격, 살아온 과정에 따라 개성이 살아있다.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한된 자원안에서 최대한 자기 것을 챙기려는 노인들의 욕심이야말로 끝까지 삶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려는 그들의 몸부림이기에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요양원에 들어올 때의 그 마음만은 헤아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생활을 받아들여야 하는 노인들의 처지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전에 어머니는 '내 집'에 있을 때 그녀의 것이었던 세계와 단절되었고, 그것을 채 애도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했고, 심지어 식사 시간 동안만이라도 전연 관계 맺고 싶지 않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법을 익혀야 했다. -71쪽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가길, 혹은 진짜 자기 집을 되찾길 기다리며 다소 긴 기간 동안 임시 체류하러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영구히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인지는 안다. - P60

우리는 여기서 지적 접근이 개인의 생애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가정하는 셈이다. 엘리아스와 보부아르의 책은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흔들린 순간, 혹은 흔들리려한 순간 태동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시선 전체가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과 사물을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에 다르게 본다. - P264

보부아르는 자신이 ‘늙은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왜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그녀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인 고령자들이 어떻게 자기들만의 말, 자기들만의 시선, 자기들만의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 자문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령자들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보부아르 책의 모든 쟁점이 있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결연히 선언한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싶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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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에 따라 신의 모습은 각각 다른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신의 얼굴에서, 그의 목소리에서 누가 보이고 누구의 말이 들리는가. 나라면 어떨까. 내 눈에 신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 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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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죽음 후 그에 대해 좋은 말만 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기보다 남은 사람들이 제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추모의 말들은 그렇기에 남은 자가 자신을 위로하는 역할도 한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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