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나타낸다.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해서 똑 같은 내용의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글은 곧 나다. 내가 본 대로,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글을 썼다고 핍박받고 평생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사람이 있다. 18세기 후반의 문인인 이옥이다
두 번의 유배 끝에 조정의 권력자에 줄을 대 현감 자리를 얻은 김려. 별 탈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젖어 지내고 있던 그에게 한 청년이 찾아온다. 행색은 남루한데 하인과 다툼 끝에 그가 읊은 글은 오랜 벗, 이제는 죽고 없는 이옥의 시다. 청년은 줄 게 있다면서 종이뭉치를 꺼낸다. 이옥이 쓴 글들이다. 그 글들을 읽으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과거가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탁월한 문장을 뽐내던 친구 이옥과 관련된 과거가.
‘세종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학식과 이념을 갖춘 군주’라는 정조임금은 학문을 닦아야 할 신하들이 소설나부랭이나 읽으며 쑥덕거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우수한 인재 선발이라는 본래 취지를 잃은 과거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는 그것이 불가능하자 통제가 가능한 성균관 유생들의 문체를 관리했다. 매달 작문시험을 치게 하고 그 답안지를 꼼꼼히 검토하고 통제하였다. 임금의 칼끝은 권력의 중심부인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아닌 몰락한 소북파의 자제인 이옥을 향했다. 글이 경박하다며 반성문을 요구하고 거듭 벌을 주는 임금의 태도를 김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임금은 한갓 유생에 불과한 이옥의 글에 그토록 많은 신경을 기울였던 것일까. 문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는 이해하겠으나 왜 그것을 영향력도 없는 유생을 골라 발휘해야만 했던 것일까. - 39쪽
이옥 역시 ‘글은 인의예지를 다루고, 그 형식은 당·송의 것이어야 한다.’는 임금의 명령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김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세상의 사람이라네. 나 스스로 나의 시, 나의 글을 지으니 저 먼 옛날 중국의 문장과 시가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 51쪽
하지만 이옥을 향한 임금의 분노를 반면교사로 삼은 신하들은 소설읽기를 멀리하고 임금이 요구하는 문체와 형식에 충실한 글을 썼다. 그렇게 임금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썼던 김려는 결국 이옥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간다.
임금은 나를 이옥의 무리로 점찍었던 것이다. 간사한 글로 세상을 홀리고 미혹한다는 낙인이 찍혀 있는 바로 그 이옥의 무리. - 26쪽
이 후 두 번의 유배를 당한 김려는 더는 글로 인한 고초를 겪고 싶지 않았다. 논산의 현감으로 부임해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는 지금 그에게 글 따위는 별게 아니었다.
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물론 끼적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글은 아니었다. - 114쪽
그가 글로 당한 고초를 잊으려 애쓰며 ‘내가 아닌 누구라도 쓸 수 있는 영혼 없는 글’을 끼적이고 있을 때 이옥은 아들을 데리고 세상을 유랑하며 전기수傳奇叟 의 삶을 살다가 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쓰고자 하는 글을 쓰다 갔으며 그 글을 친구에게 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글 뭉치를 남겼다. 이옥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김려는 유배지에서 아전들, 백정, 어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글을 썼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그 글로 인해 다시 위험에 처했던 순간과 그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제자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던 여인까지도. 군주를 거스르는 글, 체제를 위협하는 글이 얼마나 위험한지 온 몸으로 깨닫고 ‘ 고통스러운 현실이 아닌 유유자적을 노래하는 글만 쓰리라’ 결심했던 그는 친구의 환영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 말 좀 해 보게나. 앞으로 나는 어찌 살아야 하나. 거기 서서 웃지만 말고 제발 말 좀 해 주게나. - 163쪽
친구는 말이 없었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한사코 멀리하고자 했던 친구, 이옥의 글을 모아 문집을 펴낸다.
정조 시대 성균관에서 같이 수학했던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그들의 글과 삶을 소설화한 책을 읽으면서 글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의 글이, 나의 생각이 그 사회나 문화에 의해 제한당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려나 명문가 자제들처럼 입신양명을 위해 나의 글을, 생각을 스스로 검열해야 할까.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책이 나쁘다고 할 수 없으나 왜 그로 인한 희생양은 힘없는 자인가 싶어 답답하다. 이옥의 글은 섬세하고 활기찼다.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절의 나한상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원문에 대한 궁금증마저 일게 한다. 좋은 시대를 만났다면 그의 재능이 맘껏 발휘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 마음이 짠하다. 나라의 근간을 흔들거나 군주에게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본 멋진 것들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고자 했던 글쟁이 이옥에게 글이란 무엇이었던가.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 114쪽
자신이 당한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했기에 오히려 자기의 길을 꿋꿋하게 갈 수 있었던 이옥의 삶을 생각한다. 원인을 알았다 한들 자신의 뜻을 굽혔을 것 같지도 않다. 그는 18세기 말 조선의 선비였고 그가 본 것은 조선의 땅, 조선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에게 공맹이며 당·송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