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쓴 글인데 21세기인 현재 읽어도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면서 아이에게 온갖 종류의 사슬을 채워 그가 맛보지도 못할 이른바 그 행복이라는 것을 미래에 안겨준다는 미명 아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야만적인 교육을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설령 그 교육이 목적에서는 온당하다고생각할지라도, 견딜 수 없는 속박에 복종하며 그 각별한 보살핌이 자신에게 꼭 유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마치 죄수처럼 끊임없는 노역에 처해진 불쌍한 아이를 바라보며 어찌 분노가 치밀지 않겠는가?
즐거워야 할 시절은 눈물과 체벌과 위협과 속박 속에서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의 행복을 위한다며 그 불행한 아이를 괴롭힌다. 그들은 그 우울한 교육을 통해 자초하고 있는 아이의 죽음을 보지 못한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아 이런 글은 어떻게 쓸 수 있는거지? 자기 자신인 것만으로 개성이 마구마구 드러나는 글이 되다니...

그 편지들은 우리가 마치 도러시의 머릿속 깊이 들어앉아 있는 듯한, 한 통 한 통 읽어 나가는 동안 펼쳐지는 축제 행렬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분명 편지 쓰기에 있어서는 위트나 총기, 저명인사들과의 교유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별다른 노력이나 강조 없이도, 그녀는 그저 자기 자신이라는 것만으로 그 모든 잡다한 이야기를 자신의 개성으로 감싼다. 그것은 매력적이면서도 금방 드러나지 않는 성격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통해 우리는 그 개성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보적'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하게 된건 순전히 '걷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읽기는 하니 밑줄긋기도 가능한데 걷지를 않으니 '독'과 '적'만 할 수 있는거다.

5월부터 매일 30분 걷기를 하고 있었는데 9월이 되어서야 이제는 '독보적'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매일 30분 걷기로 운동이 되겠나 생각했는데 그게, 운동이 된다.

체중도 좀 줄었고, 앉았다 일어설때 손을 무릎에 대지 않고 팍! 일어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모른다. 벌떡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대단한거다.

하루 30분, 거리로는 2.8~3km 정도 동네를 한바퀴 도는 건데 별로 힘들지 않다.

그래서 매일 계속할 수 있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책 읽기도 좀 더 활발해졌다.

같이 읽고 서로 의견도 나누는 경우 동기부여가 되는데 그런 모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의무감은 없었다.

시민자유대학의 가을학기기 시작되었고, 루소의 '에밀 강의'를 듣느라 『에밀』을 다시 읽어야해서 매일 열심히 읽게 되어 그렇게 되었다.

나에게 루소는 말만 앞서는 무책임한 인간이었는데, 루소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서 『에밀』을 읽기 시작하고 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사람이다.

8주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나면 내 생각이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하면서 읽어가고 있다.



모든 것은 창조자의 수중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수중에서 모두 타락한다.『에밀』 - P61

우리는 약하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것이 결핍된 상태로 태어나므로 도움이 필요하며, 우둔한 상태로 태어나므로 판단력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면 필요하겠지만 태어나면서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에밀』 - P63

모든 악함은 약함에서 나온다.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성격이 고약해질 뿐이다. 그 아이를 강하게 만들어보라. 그는 착해질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에밀』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생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삶의 위대함. 계속 실패했지만 꼭 실패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삶.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