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상태에 빠진 아내를 보며 그동안의 무심함에 죄책감을 느끼던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책감은 분노로 바뀌지만 상대방은 변명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다.

의사는 더 이상의 의료적 처치는 의미 없다고 선언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내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면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서류를 이미 작성해뒀다.

자신의 일이외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미뤄두고 살았던 남자는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처리하기 시작한다.

아빠의 무관심과 엄마의 불륜 때문에 양친 모두에게 공격적인 큰 딸과 열 살인데 우리나라 중2처럼 행동하는 작은 딸을 챙긴다.

아내와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에게 아내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아내의 부모를 직접 찾아 간다.

장인은 딸의 불행을 모두 사위 탓으로 돌리고, 치매인 장모는 딸의 이름(엘리자베스)을 영국 여왕으로 착각한다.

큰 딸의 반응으로 보아 장인은 늘 그런 식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에게 딸은 완벽하고 사위는 수상 스키를 즐기는 아내에게 보트 한 척 사주지 않는 자린고비, 나쁜 놈이다.

 

남자는 딸과 차를 타고 가다가 아내와 바람핀 남자의 사진을 보게 되고 그가 휴가를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잠 못자며 괴로워하던 그는 그 불륜남을 만나 아내를 만나러 와달라고 부탁하기로 한다.

큰 딸은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의 생각은 이랬다.

'아내가 보러 와 주기를 원할 것이다.'

 

어찌 어찌 불륜남을 만났는데 이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그저 섹스 상대였고 자긴 아내를 너무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 남자를 정말 사랑했고 자기와 이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남자는 아내의 불륜상대가 밤일을 얼마나 잘하는지가 궁금한가 보다.

여자는 자기보다 더 젊고 이쁜지가 궁금하겠지.

근데 젊지도 이쁘지도 않으면 이해를 못한다.

 

일본영화 '메종 드 히미코'에서 주인공은 엄마가 커밍아웃한 게이 남편이 일하는 곳에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자신이 가진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찾아간 엄마를, 딸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난 알 것 같다.

남편의 상대가 자기보다 더 젊고 이쁜 여자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쉽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 생물학적 여성인 엄마의 안간힘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의 조상은 하와이 왕족으로 그 후손들은 조상이 물려준 땅의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기 전에 개발업자에게 팔려고 한다.

그는 후손이며 변호사라서  법률대리인으로 어떤 업자에게 땅을 팔 것인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

남자는 불륜남의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그가 유력한 개발업자의 인척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내가 이용당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직업이 부동산 중개인이었기 때문이다.

불륜남은 부정하지만 아내가 이혼했대도 자기는 가정을 버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신한다.

불륜남의 아내는 개발업자의 친척이므로 아내를 배신할 수 없었겠지.

저런 남자를 사랑하고 이혼까지 생각했던 아내가 밉기 보다 측은해진 남자.

 

개발업자에게 소유한 땅을 넘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날에 남자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 자신의 고향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생각했다.

자본에 팔려 훼손되는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랬다고 말이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건 남자의 세련된 복수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렸다 생각했던 아내가 사실은 사랑에 목말라하던 여자일 뿐이었고, 그것역시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의 복수.

아내의 순정을 짓밟고 이용해 온 파렴치한 남자에게 주먹질 같은 찌질한 분풀이가 아닌 어마어마한 액수의 중개수수료를 벌 기회를 날려버리게 한 통 큰 복수다.

 

남자의 처신은 현명했고, 나는 그런 지혜가 부럽다.

그는 가족의 구심점이었던 아내의 자리를 대신하며 자녀들을 돌보고, 딸을 잃은 장인, 장모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와서까지 원망을 늘어 놓는 장인에게 '더 잘해줘야 했다'고 인정하며 아내의 허물을 덮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나 같으면 배신감에 휩싸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불륜남이 엉엉 울면서 그녀를 사랑했다, 아내와 이혼수속 중이었다, 뭐 이렇게 나왔다면 어땠을까.

세련된 복수가 아닌 질투에 눈이 먼 치사한 복수를 했겠지.

경쟁자인 다른 개발업자에게 판다든지 하는.

어쨌거나 연적인 부동산 중개인 좋을 일을 하진 않았을 것 같다.

 

가끔씩 '그 때 다른 결정을 했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남편과의 긴 연애기간 동안 심하게 다툰 후 냉전중일 때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때 헤어졌어야 했어......

쿨하게 안녕을 외치고 비혼인 상태로 지냈어야 했어......

결혼과 관련해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자는 만족감을 더 표시하는 반면 여자는 그렇지 않다.

결혼생활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경험해보니 결혼은 여자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에너지를 많이 뺏는다.

'이휘재의 인생극장' 처럼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매번 다른 인생을 살아본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딱 한 번 뿐이니까 더 신중하게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357쪽

 

환자가 연명치료 등에 대해 사전에 자기 뜻을 적어 놓은 문서를 '사전의료의향서'라고 한단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도 몸도 건강할 때 문서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회생의 희망이 없는 연명치료는 자신과 가족을 괴롭힐 뿐이다.

나와 관련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미리 해 놓는다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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