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층 사이에 갇힌엘리베이터처럼 왜 우리는 두 세계관 사이에 끼어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키플링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표범에게는 반점이 필요해서 반점이 있을 뿐임을 받아들인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과학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점 이면의 메커니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지만, 다윈설, 빅뱅, 우주 팽창,
태양계의 형성은 결국 그런 식이다. 즉 목적이나 의미 같은 인간적 개념을 거부한다.
과학자들은 사라졌다고 여겼던 세계관의 기습 공격처럼 느껴지기때문에 ‘설계design‘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가 같혀 있는 두 세계관에 대한 논의를 잠시 잊는다면, 설계, 패턴, 구조, 형태라는 단어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설계‘만 유난히 끔찍하게 여겨야할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단어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설계‘라는 단어의 역사는 창조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 P145

과학자들이 거부하는 것이다. 창조론 캠페인은 과학이 지적 설계의개념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창세기를 업데이트한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과학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위협으로 본다.
실제로 지적 설계는 주로 종교인과 흥미 있는 이야기를 쫓아다니는대중매체가 매력을 느낀다.
법원은 창조론에 학교 과학 교과과정과 동등한 시간을 제공하려는모든 시도를 기각해왔다(불행히도 비록 몇몇 예외가 남아 있지만). 이 들판을 다시 경작하는 건 무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층 사이에 갇힌엘리베이터는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을 둘러보면, 우리는 모든곳에서 설계를 본다. 이게 마음의 속임수일 뿐이란 말인가? 누구도 곰과 개구리가 무지개를 경이롭게 바라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없다. 사실어떤 패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건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매우 냉정한질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주에 설계된 게 있기는 한가? - P146

세상은 빛으로 가득한데 뇌는 완전히 어둡다는 사실은 미스터리 중미스터리라고 부를수 있다. 아직 이 미스터리를 밝힐 준비가 많이 되어 있지는 않다. 우선은 관찰자와 관측 대상을 결합하는 수준에 머물것이다. 자연의 원재료들을 처리하여 아름다운 붉은 장미로 만드는데 뇌가 필요하다면, 같은 처리 과정이 설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않을까? 대답은 명백히 "그렇다"다. 장미꽃을 씹고 있을 때, 애벌레는한 시간 안에 장미의 아름다움을 파괴할 수 있지만, 애벌레가 가져간장미의 아름다움은 인간 존재가 거기에 갖다 놓은 것이다. 장미를 먹은 벌레에게 꽃은 단지 먹이일 뿐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건 사실 뇌가 아니라 마음이다. 장미에 심하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장미는 아름답기에는 너무 성가시다.
그런 사람도 짐작건대 나폴레옹 시대에 장미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였던 피에르 요셉 프루동Pierre-Joseph Redouté과 같은 뇌 메커니즘을갖고 있을 것이지만, 이들의 마음가짐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장미가 아름다운 것이 오로지 인간의 마음이 이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때문이라면, 전체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건 순진무구하지만, 폭발적인 영향을 갖고 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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