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폭력 - 자유의 최대화와 폭력의 최소화를 위한 철학적 성찰 인문정신의 탐구 27
박구용 지음 / 길(도서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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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자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검나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의리(?)로 사서 의무감으로 읽은 책인데 자유와 폭력에 대해, 개인과 연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철학자의 책은 용어부터 생소한 경우가 많아서 읽는데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뒷장 읽다보면 앞장 내용을 잊는 나이에 읽기에는 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저자의 강의를 몇 년 들어온 내공(이란게 있다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다' 라는 주장에 '정말 그래?' 라고 묻게 하는 힘이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항상 말하기를, 이것이냐 저것이냐 묻는 질문에 이것 또는 저것 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노예의 삶이라 한다.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프레임을 깨라고, 다른 눈으로 보라고 늘 이야기한다.

상대가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질문, 예를 들어 너 페미니스트야? 라는 질문에 응, 아니 라는 답변말고 네가 말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가 뭐야? 라고 질문을 던져야한다는 거다.

응 또는 아니 라는 대답을 하면 상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프레임을 나에게 씌우게 된다.

의도를 가진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응해야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 상대는 생각을 해야 한다. 

좋은 질문은 좋은 토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자유란 무조건 좋은 것인가? 

나의 자유가 어떤 자유냐에 따라 타인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폭력은 폭력이다. 폭력은 한쪽에는 자유의 극적 실현이면서 다른 한쪽에는 자유의 절대적 부정이다. 폭력으로 드러난 자유와 폭력을 은폐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다. 자유는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서는 안 된다. -126쪽

개인이 없었던 고대를 지나 개인이 탄생한 근대이후까지 자유에 대한 고찰, 개인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일정부분 자신의 자유의 제약을 수용하게 되는 과정을 철학자의 사상을 훑으며 설명하는 대목은 참 읽어내기 힘들다.

플라톤부터 현대의 철학자의 사상을 알지 못하면 읽고 있지만 읽지 못하는 상황인 셈.

자유란 그것을 누릴 힘, 권력이 많을수록 폭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할 제도가 필요하다. 

실정법을 통해 공동의 삶을 구성하고 조율하려는 사람은 법률에 의해 자신의 자유가 제약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법률은 자유를 제약하는 만큼 혹은 더 많이 자유를 보호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법은 자유를 제약하면서 동시에 증진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법이 이처럼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라는 것을 보이려면 무엇보다 법체계 안에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저항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는 법의 보호를 받기 보다는 법의 공포에 의해 침해될 위험이 크다. - 308쪽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느슨한 모임을 하고 있다. 다들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인데 그중에 (내가 생각하는) 한국 개신교도의 전형인 분이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을 주장하는.

그런 사람인줄 알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교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는 편인데 그 중 한 명이 실수로 뇌관을 건드렸다. 주일성수(일요일 예배 참석)를 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가는 건 아니라고 한거다.

그 순간 약 한 시간 정도 그분의 설교를 들어야했는데, 신자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당연한 것이며 그런식으로 요즘 신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는 젊은 목사가 더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자기 주장의 근거로 성경말씀을 들었는데(엄청난 양의 성경구절을 좔좔 읊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더 안타까웠던 부분은 뇌관을 건드린 분이 '성경말씀이 사실'이라고 한 것이다.

성경내용을 의심하지 않으면 순환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지옥에 가거나 천당에 가는 기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내용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성경말씀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깰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권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자기 부정을 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이라는 게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읽고 해석하고 실천하는 도구가 되어야하는 거 아니냐, 이런식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어야 했다.

얼떨결에 설교를 한시간씩 듣고 있으면서 '특수한 경우의 과도한 일반화로 인한 폭력이 심각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주장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열심이 지나친 사람들은 내가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비신자 포함)도 똑같이 '믿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신앙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부분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주장하는 것, 그것이 폭력이다.

로크의 말처럼 인간이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의지한다면 인간은 항상 좋은 것만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세계는 좋은 것으로 넘쳐나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나쁜 것을 선택한다. 인간 세계는 좋은것만큼 나쁜 것도 많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로크의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들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좋은 것을 지향하고 결정하지만, 그것이 다른 모든 인간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의지의 결정과정은 쾌락을 지향하는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자연주의적으로 결정된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과적 고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332쪽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같음'보다는 '다름'이 커진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름'을 '틀림'으로 감금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따로 또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567쪽

자유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서로를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너'가 있기에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과 그에 따른 실천만이 자유를 최대화하고 폭력을 최소화하는 길이 될 것이다.

주인의 권력이 노예와의 관계에서 성립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자기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소유 가능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순간에 권력은 폭력이 된다. 인간을 도구로서 사물화하는 권력은 비록 유용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정당화 될 수 있을지라도 상호성과 공속성의 측면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그것이 친구 관계이든 적대 관계이든 상관없이- 타자에 의존한다. 적대 관계에서조차도 나는 적인 타자 속에서 나를 살피고 재보며 집착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다.  -635쪽


인정투쟁 없이도 무시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있다면 좋겠지만, 이를 기대하는 사람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이다. 인정투쟁의 과정없이 권력자가 미리 시혜를 베풀어 일시적으로 자유를 향유할 수는 있다. 이 경우에 폭력은 은밀하게 행사되기 때문에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폭력을 감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찠거나 남이 베풀어 준 자유와 남이 허가한 자유는 언젠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그렇지 않으면 회수될 수 있는 부자유이다. 스스로 사물화를 감내하면서 향유하는 자유와 불특정 타인의 총괄개념인 카메라에 포획된 자유는 비상 상황 아래에서 언제나 나를 추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부자유, 곧 폭력의 전주곡이다. 너와 내가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자유와 공공성의 영역에서 인정투쟁의 과정을 통해 축적한 자유만이 불가역적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의 인간 공동체가 바로 최고의 자유이다." - P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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