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친구 소개로 미국 동부에서 고래 잡이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들을 둘러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포경 도시들을 둘러보며
들은 이야기들과 여행 사진들 정리 차원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과 함께 요약해 보았다.
미국 포경(捕鯨 고래 잡이 Whaling)의 역사
미국 포경(捕鯨 not 包莖)업의 역사는 식민지 시대였던 1830년대 뉴욕 롱 아일랜드 및 케이프 코드와 낸터킷등 매사추세츠 주를 포함한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종교 개혁후 영국의 퀘이커 (Quakers)교도들은
영국 국교의 탄압을 피해1680년대 부터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정착한다. 그런데 뉴 잉글랜드 지역까지 진출한 이들은 매사추세츠 주의 청교도들에 의해 이단시 되면서 종교적 탄압을 당하고 이를 피해 뉴 베드포드
(New Bedford)와 낸터킷 (Nantucket) 섬까지 오게 된다.
떠는넘들 이란 (Quakers) 뜻을 가진 이들의 이름은 예배/기도시 몸을 떠는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에서 유래 되었다. (너희들 예배할때 떨고 있니?
(Are you quakers?) 응 (Yes, we are quakers) 뭐
대충 이렇게) 이들은 해안에 나타나는 참고래 (right whale) 사냥법을 인디언들 에게 배우고 연안에서 고래사냥을 시작한다. 고래는 몸에 지방 성분이 많아
죽으면 물에 뜨게 되는데 이런 고래를 잡아보고는 “마저 바로 이넘이야” ( It’s the right
one!)라고 해서 “참”고래가 됐다는…. 그런데 “고래 사냥”하면 소규모 영세업 처럼 없어 보이고 “포경” 하면,
“포경 수술”과 헷갈림에도 불구하고, 좀 있어
보이는건 사대주의 주입식 교육 때문이니 내 잘못만은 아니다.
어쨌든 포경의 시작은 고기 때문이었으나,
포경업을 촉발 시킨것은 램프의 원료로 경유(鯨油 고래기름. 디젤 경유(輕油)가 아닌)가 쓰이기 시작하면서
이다. 기름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포획량을 늘리기
위해 고래를 찾아 먼 바다로 나아가게 되고 상대적으로 고기는 보존 문제및 기름에 비해 낮은 수익성 때문에 시장성을 잃는다. (근해에서 잡게 되는 고래는 여전히 기름, 수염, 고기, 내장 등등을 모두 인기리에 나누어 팔았다.)
바다로
나아가기 용이한, 해안에서 30마일 떨어진, 낸터킷 섬이 초기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지만 1846년 대화재로 타격을 입는다. 이에
1850년대 부터는 포경선 보호에 유리한 항만과 (철도를 포함한) 제반 산업 시설을 갖춘 뉴 베드포드로 그 중심이 옮겨 진다. 1853년은 포경 산업의 정점이
되는 해로 약 천백만달러의 판매고를 올린다. 축적된 부는 은행등의 금융업과 철도 시설등에 투자되고 퀘이커
교도들이 중심이 된 도시는 도박이나 유흥 보다는 건전한 사업적 재투자와 사회 환원이 이루어 진다. 기존의
교리/ 성직자/ 교회 보다 형식없는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내적 만남 혹은
“내면의 빛”을 중요시 하는 퀘이커 교도에게, 고래 기름을 통한 “세상의 빛”으로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은, 매우 적합한 일이었다.
한편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까지 그 대용으로 쓰인것이 케라틴 (keratin)이란
물질로 이루어진 고래 수염(baleen) 이었는데 남자용 옷깃(칼라)을 세우는 액서서리, 말 채찍, 우산대 그리고 여성용
코르셋등에 쓰였다. 하지만 1849년의 골드러시,
1859년 페트롤륨의 발견, 1861년 남북 전쟁등으로 포경업은 서서히 쇠퇴한다.
1871년 알래스카에서 포경선단 40척중32척이 얼음에 갇힌체 버려지거나 침몰하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의 사고가 일어나고 1924년에는
뉴 베드포드의 마지막 포경선 원더러 (Wanderer)호가 허리케인으로 인해 해안으로 밀려 좌초됨으로써 미국의
포경업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는 학술 목적을 제외한 모든 상업적 포경을 금지 시킨다. 그런데 강대국 눈치 않봐도 되는 어떤 넘들은 학술 목적(?)으로 고래 고기를 아직도 즐겨 먹는다니
대놓고 부러워 할 순 없다.
고래의 종류와 향유(香油)고래 (Sperm Whale)
먼저, 헐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딕 (Moby Dick 백경 白鯨)은 향유(香油)고래 (sperm whales)라는데 고래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고래 관광으로는 어떤 고래를 볼 수 있는지 정리했다. 고래는
수염고래(baleen whales)와 이빨고래(toothed whales)로 나뉘어진다. 돌고래, 범고래
(killer whales) 그리고 향유고래는 이빨고래에 속한다. 대부분의 고래가
수염으로 물을 걸러내고 먹이를 삼키는 수염고래지만 향유고래는 대왕 오징어가 주식인 이빨 고래다. 돌고래는
아래/위 이빨이 있는 반면 향유고래는 수컷만 아래에 이빨이 있는데 먹는데 쓰인다기 보다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끼리의 싸움에 쓰인다는 설이 유력하다. 수컷들이란….ㅋㅋㅋ
사각형인 머리가 전체 길이의 1/3을 차지한다. 몸 길이는 보통15~20미터 이고230dB의 소리를 낼 수 있으며 뇌 무게는 사람의 5배 이상이다. 몸 빛깔은 나이와
더불어 흰색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 모비딕도 연차는 좀 되신듯. 하지만 나처럼 어릴적(?) 부터 머리카락 탈색이 심화되는 경우도 있으니 젊은 돌연변이 일 수도?
그러니까 나의 요점은 하얗다고 다 난폭한건 아니라는 것. 수명은 60년이상으로
4년~20년에 한번 새끼를 낳아 10년 이상을
키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중 향유고래로
추정되는 넘은 살아 있는 머리 각 때문인듯 한데 특유의 머리 모양으로 각종 인간의 창작물에 애용된다. 이 머리부분의 기름은 물로 냉각되면 고체화하여 비중이 커져 물속에서
무게추의 역할을 하여 고래가 잠수 (~2km 까지도 가능)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이론과 방향 정위 (Echolocation) 또는 바이오 쏘나 (Bio Sonar)에 쓰인다는 이론이 있다. 향유 고래의 기름은 냄새나 연기가 적고 밝은 광도를 주는 가장 인기
있는 포획 상품이 된다. 당시 조도의 단위로 쓰인것이 바로 향유 고래 기름으로 만든 초 하나의 밝기였다.
기름이 윤활유와 양초등에 쓰인것 외에 장(腸)속의 소화물과 오징어등의 소화되지 않는 물질이 섞여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용연향 (ambergris龍延香)은 향수의 고정액 원료로 쓰이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쌀 정도로 귀하게 취급된다. 머리에서 나오는 품질 좋은 고래 기름을 옛날 서양의 포경 선원들은 고래의
정액이라고 생각하여 정자고래 (Sperm Whale)가 되었지만 양반인 우리나라에서는 용연향 때문에 향유(香油)고래가 된듯 하다.
그래서 내가 만든 사자성어. 짜잔!
동향서정(東香西精): 서양에선 정자 고래로
불리지만 동양에선 향유고래라 불리우는 사실에서 유래된 말로 남들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지 혼자 엉뚱 하거나 엉큼한 생각을 하는것을 말한다.
예1) 중학교 기술 시간에 선생님께서 볼트/너트를 설명 하시는데 친구들끼리 낄낄 거릴때 “이런 동향서정 하는 넘들을 봤나”
할 수 있다. 예2) 신동엽.
어쨌든 수염고래에는 흰긴수염고래 (혹은
대왕고래Blue Whale), 수염고래 또는 지느러미 고래(Fin Whale), 참고래 (큰고래Right Whale), 혹등고래
(Humpback Whale), 귀신고래 (쇠고래Gray
Whale), 북극고래 (Bowhead Whale), 밍크고래
(Minke Whale)등이 있으며 고래 관광에서는 주로 수염고래, 밍크고래,
그리고 아크로베틱한 요동을 잘 쳐서 인기있는 혹등고래등을 볼 수 있다. 귀신고래는
바닥을 훑고 다녀서 보기 힘들것 같고 근래에 와서 가장 유명한건 역시 개그콘서트 김준현의 고뤠? 가 아닐까….
뉴 베드포드와 낸터킷 그리고 모비딕 (New Beford, Natucket, and Moby Dick)-에식스(Essex)
와 모카딕 (Moca-Dick)
미국의 대표적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 모비딕은 여러 사회계층의 주인공들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주제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문체로 그려 내고 있다는데 원작을 읽어 보질 않았으니 알 수 가 있나. 어쨌든 선과 악,
신의 존재에 대한 주인공들의 신념들이 세익스피어적 문학 장치인 긴 독백과 방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한다.
얼핏 봐도 주인공 “이스마엘” (구약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첩에서 낳은 첫째 아들), 피쿼드(Pequod)호의 선장 “아합” (구약성서의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등의 이름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나름 무게있고 복잡할법 하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이름들 보다는 뭔가 의미가 있겠지.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이름으로 처음 제안 되었던 것이 피쿼드였는데 설립자들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스타벅(Starbuck)은 피쿼드호의 1등 항해사이다.
작살잡이 퀴퀘그 (Queequeg)가 타는 고래 잡이 보우트를 책임진다.
스타벅은 실제로 낸터킷 섬의 중요한 퀘이커 교도의 성 (family name)중
하나이며 소설에서는 선장에 대한 충성과 고향과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결혼한 젊고 지적인 낸터킷 출신의 퀘이커교도로 나온단다.
뉴 베드포드와 낸터킷은 고래와 관련된 많은 볼거리들에 더해서 소설 모비딕의 고래잡이
중심지로 묘사 되면서 더욱 풍성한 문화 컨텐츠를 가지게 된다. 또 관계자들은 이를 위해 모비딕의 작가 헐먼 멜빌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울산시도 크루즈 패밀리 (Croods)같은 분위기의, 반구대 암각화를 새기던, 원시 부족의
고래 사냥 만화 영화에 투자 해야 된다) 1840년 21살의 헐먼 멜빌은
뉴 베드포드의 맞은편 페어헤이븐 (Fairhaven)에서 포경선 어쿠슈넷 (Acushnet)을 타고 18개월 정도 고래잡이를 경험하는데 1841년
갬(gam)* 동안 남태평양에서 리마(Lima)호의 윌리엄 헨리 체이스로 부터 에식스(Essex)호의 1등 항해사 였던 그의 아버지 오웬(Owen Chase)이 기록한 항해 일지(난파 기록을 포함한)를 보게 된다. 에식스 사건은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1820년 남아메리카 서해안에서 향유고래에 의해 난파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이야기로, 8명
생존자중 하나인 당시의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의 1821년 기록을
멜빌이 보게 된다. 1842년 멜빌은 고래 잡이 항해를 마치지 않고 마르큐사스 섬
(Marquesas Island)에 내린다. 멜빌에게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중 다른 하나는 칠레의 모카섬 근처에서 잡은 하얀 향유고래 모카딕 (Mocha Dick)에 관해 이야기다.
이 고래는 등에 스무개 이상의 작살이 꽂혀 있었으며 종종 포경선을 공격했었다고 전해지는데 탐험가 제레미 레이놀즈 (Jeremiah N. Reynolds) 에 의해1839년 발행된 뉴욕의 어느 한 월간지(The
Knickerbocker)에 관련기사가 실리게 되고 이를 멜빌이 보게 된다. 그 후1851년 11월 모비딕이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된다. 1852년 멜빌은 처음으로 낸터킷을 방문하고 당시 생존해 있던 에식스의 선장 조지 폴라드 (George Pollard)를 만난다. 모비딕에서 그려지고 있는 생생한 고래 잡이에 대한 이야기들은 멜빌이 접했던 여러
자료들과 뉴 베드포드의 고래 잡이 경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갬(gam) 이란 서로
다른 포경선의 선원들이 바다에서 만나 서로 교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린핸드(Green Hands)
그린핸드 (Green Hands)란 주로 14세부터 18세까지의 처음 고래 잡이를 시작한 소년들을 말한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매일 제공되는 빵과 침대 (계약에 없던 음료와 침구류는 승선후에 임금으로 따로 구입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포경선에서 얻어지는 전체 이윤에 대한 자그마한 할당금등에 이끌려 고래잡이를 시작했다. 한번 포경에
나서면 포경선에 고래 기름이 가득 채워질때 까지 보통 3~5년 정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많은 수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작살잡이가 고래를 잡게 되면 경랍(鯨蠟, Blubber: 모든 고래류, 기각류, 해우류의 피하에 존재하는 두꺼운 지방조직)을 분리시켜 기름을 채취하는 작업을 맡게 되는데 파도에
흔들리는 어두운 배 안에서 날카로운 칼과 쇠꼬챙이가 동반되는 (당시엔 귀했던 신발 없이) 맨발로 이루어지는 위험한 이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발가락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험난한 과정에서 살아남는 자들은 그 경험으로 대우가 나아지는 항해사로 진급하고 또 그 중에서 나중에 선장으로도 진급했으나 포경 산업의 퇴조와
골드 러시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21살에 포경선을 탔던 멜빌이 저런일을 한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모비딕에선 고래 잡이 작업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궁금한데 요즘 누가 이 포경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면 아마도
낭만적인 측면 보다는 못가진자들과 이들 포경선을 운영했던 부유한 가진자들을 비교해서 보여 줄 듯 싶다. 설국포경선
(雪國捕鯨船)? ㅋㅋㅋ. 같은 이름의 원작
“In the heart of the sea”를 가지고 론 하워드 감독이 만들고 있다는 영화는 앞에서 언급한
모비딕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향유 고래 모카딕에 의해 침몰된 포경선 “에식스
(Essex)” 의 생존자 이야기라는데 어떤 관점에서 그려질지 궁금하다.
포경과 뉴 베드포드 국립 포경 공원 (New Bedford Whaling National Historcial Park)
뉴 베드포드에는 포경 국립 역사 공원이 있다. 공원 안에는 포경
박물관, 베델 교회, RJD 박물관외에 여러 고래 관련 유물/건물및 문화 유산등이 있다.
국립 공원 관광 안내소 (Visitor’s Center)
뉴 베드포드 포경 국립 역사 공원은 1996년에 세워졌으며
국립 공원 써비스 (NPS National Park Service)에 의해 관리 되지만 관광 안내소와 코슨
해양 교육관 (Corson Maritime Learning Center)등 두개의 건물만을 소유하고 나머지
건물들은 뉴 베드포드 시 및 개인 소유주들과 파트너쉽을 맺고 관리/유지 되고 있다. 단체 관광인 경우 예약을 하면 전반적인 공원의 역사와 내용들에 대해 파크레인저의 친절한 안내를 영어로 받을 수 있다.
포경 박물관과 도서관 (New
Bedford Whaling Museum and Library)
박물관 입구의 아담함에 비해1층 로비에는
세 종류의 거대한 고래 골격들 - 흰긴수염고래(Blue Whale), 혹등고래(Humpback Whale), 그리고 참고래(Right Whale)-이 꽤 멋있게 전시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전시되기 시작한 흰긴수염고래에서는 아직도 고래기름이
채취되고 있다. 또한 임신중이 었던 어미 참고래는 새끼고래의 골격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생각보다 초라했던 스미스소니언의 귀신고래(Gray Whale)전시*나 뉴욕 자연사 박물관의
고래 특별전**에 비하면 분위기나 규모/조명등이 월등하다. 2층에는
향유고래(Sperm Whale)가 실제 고래잡이 보우트, 인체 골격
모형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낸터킷 포경 박물관***의 전시와 매우 흡사하다. 이들 고래들
외에 1층에는 포경선 라고다 (Lagoda)호가 실물의 ½
크기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미스틱 씨포트 (Mystic
Seaport)와 함께 실제 포경선 챨스 모건 (Charles W. Morgan)호를 복원 (5년간 7백만불 예산) 하여 2014년 뉴 베드포드를 방문하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뉴 잉글랜드 지역중 매사추세츠 지역 남부 연안을 일컫는 올드다트무스 (Old Dartmouth) 지역의 포경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은 이 외에도 세계 최대 3000 여점의 스크림쇼
(scrimshaw)****와 2500 여개의 포경 항해 기록일지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 지역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들과 유리 공예품/ 가구/ 장식품등 19세기 포경업으로 번영했던 당시 뉴 베드포드의 부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시물외에 여름방학 동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여러가지 다양한 체험/교육 프로그램등이
진행되며 박물관 1층 로비의 고래 전시실은 지역 주민들의 행사와 연회/결혼 장소 등으로 대여 가능하여 지역 주민/대중과의 홍보/소통에 기여하고 있다.
* 수도 워싱턴
(Washington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2층
(Smithsonian Institutio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NMNH) 포유류 전시관에 가면 샘플이 한국에서 왔다는 조그마한 소개와 함께 무슨 백화점 세일하듯 귀신고래 골격이 전시되어 있다.
http://collections.nmnh.si.edu/search/mammals/
에 가서 “Whale Collection Search” 탭을 선택한후 귀신고래의
학명 “Eschrichtius robustus”을 ”Scientific
Name”에 넣고, “Country”란에 “Korea”를 선택한후 “Search”를 누르면 4번째 자료가 경상남도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를 누르면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인디애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었던 스미스소니언의 고고학자 로이 채프만 앤드류즈 박사가 (Roy Chapman Andrews)
1912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구한 자료라고 나와 있다.
** 뉴욕 자연사 박물관 4층 에서는 2013년 3월23일 부터 2014년 1월 5일까지 고래 특별 전시(Whales:
Giants of the Deep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를 하고 있는데
어른 $29입장료가 뉴 베드포드 박물관 ($14)의 2배 이상임을 생각하면 자리값 이려니 하면 된다. 주로 뉴질랜드의 포경 역사를 보여 주면서 고래와
자연을 사랑하는 미국은 잔혹했던 고래 남획(濫獲)을 금지 시키고 자연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고 하니 역시(?) 미국이다. 게다가 물고기에서
진화됐던 돼지 종류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고래가 되었다면서 갖다 놓은 뼈다귀들을 보면 빨리 1층에 내려가
강화섬유 (fiber glass)로 만든 거대한 흰수염고래 모형 아래 누워있는 사람들 옆에 자빠지고 싶다.
***낸터킷 역사 보존 협회
소속의 낸터킷 포경 박물관 (Whaling Museum of the Nantucket Historical Association) 은 앞서 언급한 1846년의 대화재 후에 고래 기름-양초
공장으로 지어져서 1860년까지 쓰여지다가 그후 창고로 사용되었고 1929년에 고래 박물관이 되었다. 2005년 재건축 되어 1847년의 양초공장, 1881년의 종탑등을 재현했고 낸터킷 섬 전경이 보이는 2층과 향유고래 골격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발행된 멜빌의 모비딕 초판이 있다. 여러 관련
프로그램등이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스크림쇼 (scrimshaw)란 선원들이 심심풀이로 항해중에 조개 껍질이나 고래뼈, 이빨등으로 만든 수공예품을 말한다
선원들의 베델 교회 (Seamen's Bethel)
1832년 뉴 베드포드 항만
협회에서 지은 채플로 포경 선원들이 출항 기념 예배를 드리는 건물로 사용되어 졌으며 평상시에는 선원들을 위한 글쓰기등의 교육도 이루어 졌다고 한다.
건물 벽에는 희생된 고래잡이들과 최근까지 바다에서 희생된 고기잡이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어 매년 종 (독립기념종을 만든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1956년에 아일랜드와 웨일즈 등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제작된 영화 (그레고리 팩Gregory Peck 주연,감독/ 각본 존 휴스턴John
Huston) 에서 나오는 고래잡이 배 모양의 설교단 (멜빌의 상상력에 의해 고안된)이 유명한데 이는 실제 이 채플에 있었던것 이 아니라 후에 영화를 본 관광객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이 건물은1996년에 다른 여러 아이콘들과
함께 국립 포경 역사 공원에 포함 되었다.
RJD 박물관
(Rotch-Jones-Duff House and Garden Museum)
윌리엄 로치 쥬니어(William Rotch Jr.,
1834 to 1850), 에드워드 코핀 존스 (Edward Coffin Jones, 1851 –
1935), 마크 더프 (Mark M. Duff, 1935 – 1981) 가 살았던
집으로 당시 포경업으로 부를 이룬 로치가(家)가 지은 저택이다.
미국 건축 학회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를
세우고 초대 회장을 지낸 리차드 업존 (Richard Upjohn)에 의해 설계 되었고 포경선을 지었던 목수들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지금은 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당시의 건축 스타일과
포경업/ 상업으로 이룬 부 (퀘이커 교도여서 집을 겸손히 지은 편이라고
한다)를 느껴 볼 수 있다. 포경선을 연상하며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화려한 식기류및 유리세트, 아이들의
장난감 방, 세련된 화장실, 최고급 고래 기름으로 방안을 빛냈을 샹들리에, 하계/동계로 나뉘어진
부엌, 1900년도 초기에 지어진 집안 엘리베이터등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로치가와 코핀가는 메이시 (Macy) 백화점의 메이시가와 사돈에 팔촌등으로 얽히고 섥힌
지연/혈연에 종교까지 연관된 그 지방에선 잘 나가는 가문들 인듯 하다. 백화점을 세운 로렌드 허시 메이시는
(Rowland Hussey Macy)는 낸터킷 출신으로15살때 포경선 에밀리 모건
(Emily Morgan)호를 탔는데 그의 손에 넣은 빨간 별 문신이 오늘날 메이시 백화점의 로고가 되었다.
미스틱 씨포트 (Mystic Seaport) 해양 박물관: The Museum of America and the Sea
코네티컷 주 미스틱에 조성된 해양 민속촌 같은 개념의 마을로 여러 옛날 배들과 상점등을 복원하여 19세기풍의 항구도시를 재현했다.
이 동네 이름 Mystic은 원래 “미스터리하다”란 뜻에서 온건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약간 미스터리 한 부분도 있는 동네의
강 (Mystic River)에서 온 이름이다. 코네티컷 주에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 피커트 (Pequots)부족의 “missi-tuk”이란
말(풍랑이 이는 큰 강) 에서 유래되어 Mistick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Mystic이 되었다. 1941년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조 포경선 찰스 모건호 (Charles W. Morgan)를 입수하여 유명해졌다.
매년 4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전문적 해양 관련 연구 프로그램등이 진행된다.
자연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뉴 베드포드에 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느낌이 강한데 그래서 뭐 어쨌다는건 아니다.
마을 항만 근처에는 작고 예쁜 가게들이 요즘 사람들 취향대로 세워져 있다. 찰스
모건호는 2013년 7월 21일
의 역사적 출항 이후 다시 재 출항을 위해 수리중인데 창고 뒤에 교묘히 숨겨져 있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24불의 엄청난 입장료를 내야 한다.
미국의 식민지는 대충 영국은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네덜란드는 지금의 뉴욕 시에,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펜실베니아 주에, 청교도들은 뉴 잉글랜드 지방에, 그리고 미국으로 오는 대신 자유를 얻은 영국의 범죄자들은 조지아
주에 각각 정착했다고 위키백과에 나와있다. 그러고 보니 남쪽으로 내려오는 네덜란드와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영국 사이에 코네티컷이 끼여 있다.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 미스틱 강 부근의 땅 소유권을 둘러싸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경쟁하며 동네에 살던 피커트 부족과도 갈등을 빚는다. 이에 1637-38년, 영국의 매사추세츠만 (Massachusetts Bay) 식민지, 플리머스 (Plymouth) 식민지,
세이부룩 (Saybrook) 식민지 개척자들이 나라간셋트 (Narragansett)족, 모히칸 (Mohegan)족과 연합하여 피커트 부족과
전쟁을 벌여 이 부족을 거의 몰살시킨다. (모히칸족과 나라간셋족은 전통적으로 피쿼트 족과 앙숙이었다.)
참고로 라틴어 Mysticeti 은 수염고래(Baleen
Whale)를 뜻한다는데 라틴어를 어디서 줏어 들은 인디언이 강을 따라 가다가 바다의 고래를 보고 그런 이름을 붙인건
아닌지. 아님말고. 모비딕의 포경선 이름Pequod가 피커트족 처럼 암울한 미래를 암시한다고 한다.
새로운 관광 상품: 고래 잡이 배 경주 대회 (Regatta)
-양키 (Yankee)와 아조리안 (Azorian)의 고래잡이
(open-boat whaling)
현대적 포경작업 전의 19세기 초에 고래를 잡던 포경선(Whale Ship)은 실제
고래 잡는 사람들 6~7명이 타는 고래 잡이 보트 (Whale Boat)를4~5대, 배 좌,우측에 나누어 달고 다닌다. 고래가 발견되면 그 보트의 작은 선장이 되는 부관(mate),
작살잡이 (harpooner), 및 4~5명이
노를 저어 고래의 뒤로 접근한다. 고래는 옆에 눈이 있고 앞에는 입과 이빨이 (향유 고래의 경우)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뒷쪽의 꼬리 부근으로 배를 갖다 댄다. 이때 고래가 꼬리를 치면 배가 난파되어 근처에 몰려
있던 상어들과 함께 고생 하게된다. 운좋게 작살*이 고래에 꽂히게 되면 작살끝의 갈고리가 벌려져 단단히 몸에 박히게 된다.
이때 고래가 그 아픔을 꾹 참고 요동을 치지 않고 얌전히 도망가면 “악마고래”,
“귀신고래” 등의 별명이나 사람을 공격하는 무서운 넘들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있다.
박혀 있는 작살은 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고래가 사람들을 떨쳐 버리기란 쉽지 않다. 고래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잠수를 타는 것인데 이 경우 고래 잡이들도 제때에 줄을 끊어야만 살 수 있다. 고래 잡이들의 유일한 희망사항은 고래가 수면 근처에 계속 머물면서 도망가는 것인데 이때 손 화상에 주의 하며 줄에 매달려 고래와
몇 시간 죽자살자 달리다보면 결국 고래가 지치게 되고 이때 고래 옆으로 접근하여 긴 창으로 허파 부근을 찔러-바람을 넣어 죽이게 되는건지 바람을 빼서 죽이게 되는건지-어쨋든 죽인다. 이렇게 잡은 고래를 돛과 노를 이용해서 보우트로 끌어서 다시 포경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겉보기엔 평범한 노젓는 돛단배지만 이런 이야기가 담긴 보우트는 그 후손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한 의미를 살려 오늘날에도 뉴 베드포드 에서는 매년 국제 아조리안 고래 잡이 보우트 경기대회가 열린다. 과거 뉴 잉글랜드-뉴 베드포드 지역에서 출발한 포경선은 고래를 쫓아 전 세계를 돌았는데 대서양
건너의 포르투칼 아조레스 제도 (Azores)의 섬들과도 교류하게 되었고 지금도 이 지역에는 포르투칼 아조리안
(Azorean)계 미국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아조리안 해양 문화 유산 협회
(Azorean Maritime Heritage Society)를 통해 뉴 베드포드와 아조리안 사람들간의 고래 잡이 보우트
경기를 하고 있다.
*초기에 작살포 보다는 손으로 작살을 던지는 것이 선호된 이유는 포 소리 때문에 나머지 고래떼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와 작살포의
낮은 명중률 때문이었다. 나중엔 결국 포경선의 발달과 함께 작살포가 대세가 된다.
관경 사업으로의 전환
1859년 부터 펜실베니아 주에서 고래 기름을 대체 할 수 있는
페트롤륨 (petroleum) 이 발견됨으로 포경업은 퇴조한다. 돈
벌이가 더 이상 되지 않던 고래관련 사업은 한동안 잊혀 졌지만 요즘 다시 고래 관광 사업으로 성장 하고 있다. 고래 관광 사업은 만3천명정도가 종사하고 있는 고성장의 사업으로 2008년에만 전 세계적으로 천삼백만명의 관광객과 21억 달러의 매상을 기록했다. 바다에서 그저 놀기만 하는것이 아닌 교육적/과학적 느낌을 주는 이 관광업은 왠지 계속 성장
할 것 같은 사업이다. 고래만 잘 나타나 준다면 말이다. 낭만적 바다를
꿈꾸지만 해적 놀이 하기에는 비도덕적인것 같고 배만 타기엔 뭔가 심심할때 컨텐츠를 갖춘 고래 구경을 위한 짧은 배 여행은 매력적이다.
거기다가 고래 고기 대신 낚시 여행이나 회로 마무리하면 더 좋을 듯. 최초의 고래
관광 사업은 1950년 샌디에고에서 쇠고래 (또는 귀신고래
Gray Whale) 구경으로 시작되었는데 1985년에는 뉴 잉글랜드의 관광객 수가
캘리포니아를 앞질렀다. 이는 관경선의 항구가 보스턴등 대도시에 근접한 이유와 무엇보다 선전 팜플렛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혹등고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인데 혹등고래는 다른 고래들과 달리 물 바깥으로 온 몸을 솟구치거나 꼬리를 치는 아크로베틱한 구경거리를
보여준다. 이 외에도 현재 보스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고래는 긴수염고래 (Fin
Whale)와 정어리고래 (Minke Wahle)다.
뉴 베드포드와 나의 지금
한편 뉴 베드포드는 미국에서1840년 중반 페트롤륨을
램프와 그밖의 용도에 쓸 수 있도록 정제하는 첫번째 도시가 된다. 또한 1881의류 산업에 맞는 제반 시설과 기후 덕분에 1940년대 까지도 부유함을 누린다.
한때 뉴 베드포드 에는 32개 회사 3만명의
직원이 1억불의 매상을 올리기도 했다. 현재 뉴 베드포드에는 보트 낚시
외에도 의류 제조 회사인 리버사이드 (Riverside Manufacturing),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에서
10번째로 큰 건강 관련 업체인 사우스코스트 의료그룹 (Southcoast Hospital Group) 과 타이틀리스트 (Titleist)와 풋조이 (Footjoy)를 만드는 골프 관련 제조 업체 어쿠슈넷 (Acushnet) 등이 있다. 최근에 한국 기업이 인수한 이 회사의 이름이 모비딕의 저자 멜빌이 탔던 포경선 이름인줄 이제야 알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포경업으로 재테크의 노하우가 쌓인 넘들은 고래 기름이 없어져도
페트롤륨 정제로 돈을 계속 벌기도 하고 의류및 의료/ 스포츠 사업으로 전환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발가락을 잘리고, 죽도록 몇년을 고생하고, 선장의
꿈을 꾸며, 고래 잡이를 하다가 죽어간 퀘이커 교도가 있는가 하면 딸들에게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자신의 포경
선단을 보여주기 위해 2층 다락방위에 조그마한 관망대를 겸손히(?) 만들어 주던 퀘이커 교도도 있다. 메이시의 경우 처럼 성공하는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해 보고는
바로 업종을 바꾼다. 그래서 나도 고래 관광업으로 업종 전환을 생각하지만 결국 ‘그래도 멸치 잡이 배보단 낫지’ 하며 오늘도 고래 잡이 배에 오른다. 너무 엔지니어에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